꽉 막힌 도로위의 신호가 더디게도 흘러간다. 잔뜩 주름진 미간과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주시하는 날카로운 눈동자가 당사자가 얼마나 다급한지 또 예민한지를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었다. 바이어 미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시간 속에서 석우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갑갑한 마음에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차창을 내린다. 흩뿌려지는 연기로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빡빡하게 줄지어선 차들이 들어오고, 한 번 더 한숨처럼 뱉어지는 연기와 함께 인도에 닿은 시선 끝에 이번엔 색다른 것이 들어온다. 온통 시꺼멓고 딱딱한 배경 속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희안하게도 눈길을 사로잡는, 찬란하리만치 눈이 부신. 평소였다면 이런 쓸데없는 감상따위 집어치우고 그저 앞만 보고 내달렸을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봄이 지척에 다가왔음에도 흐린 날씨탓일지도 모른다.
가지런한 머리카락, 가는 목선을 감싼 하얀 목폴라 니트, 연분홍빛 코트를 제 것처럼 소화해내는 그의 얼굴에서 석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햇살 하나 들지 않는 잿빛 배경속에서 투명하리만치 하얀 그의 피부는 마치 바닥을 꿈틀거리는 온갖 추잡스러운 욕망까지도 무방비하게 투영시켜버릴 것만 같아서 두렵기도 한 것이었다. 석우은 꺼끌한 입안을 혀로 축였다. 꿀꺽 삼켜낸 덩어리가 목울대를 넘실거렸다. 나풀거리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꼽고 걷던 그가 갑자기 멈추어서선 이 쪽을 돌아본다.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든다. 그제서야 멀어졌던 오감이 차차 덮쳐오고 빵빵- 클락션소리가 사정없이 귓전을 때린다. 도망이라도 가듯 황급하게 시선을 거두고 마른세수를 마친 그가 한손을 핸드 브레이크 위에 얹었다. 라디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얼마전 수안이가 따라부르던 뽀로로송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기는 해? 끔찍하리만치 질린다 당신이란 사람.
동시에 찾아든 두통과도 같은 기억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눌렀다. 서서히 멀어져가는 백미러 속의 자그마한 뒷통수에게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