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변ㅂㅇ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짧다. 4천자 나오려나...단문리퀘.
난 무능력한 사람이니까....
그냥 나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어. 내일은 있는데 당신은 없어. 먹먹하네.
깨비사자
그렇게,
"이봐, 저승. 너넨 뭐 휴가 같은 거 안 줘? 위에서?"
"뭔가 잊었나본데, 나 벌받는 중이거든."
메이드 인 헤븐의 타칭 상스러운 중절모를 어김없이 집어들던 저승사자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안그래도 공휴일이 많은 5월인데다 곧 다가올 여름엔 휴가철이다 뭐다해서 마중나갈 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환장할 지경일진데 부주의한 도깨비는 그런 저승사자의 고충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질문했다. 그러고보면 요근래, 한 3년쯤이니 인간의 기준으로 요근래라고 하긴 좀 뭣하긴 한데 아무튼 도깨비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는 것을 문득 떠올렸다. 자신은 결코 열 수 없는 저 문 너머의 어떤 세상으로 드나드는 횟수가 지나치게 증가하고, 어떤 날은 나른한 봄냄새를 또 어떤 날은 찌는 듯한 여름 더위를, 또 어떤 날은 시릴 듯이 차가운 겨울아침을, 그리고 지금은 코끝을 파고드는 메밀꽃향기를 가져와 온 거실을 진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보다 몇 곱절이나 오래 이어진 또 이어갈 생을 부여받은 신의 생각을 쉬이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인간들이 말하는 노망이라는 것이 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인가를 저승사자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뜬금없이 왜 휴가를 찾느냐고 묻는 제 말에 머쓱하게 배 긁으며 같이 해외여행이라도 가려고 했지 하는 도깨비를 보며 더더욱이 말이다.
"외국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다녀오는 거 아니었어?"
저 문으로? 저승사자의 손가락이 현관문을 가리켰다. 도깨비의 시선 역시 그 손가락을 따라 문쪽으로 슬쩍 향했다가 도로 제자리를 잡았다. 저승사자 말마따나 천 년에 가까운 생을 이어가면서 지구상에 자신의 발이 닿지 않은 땅이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이미 죄다 저 문을 통해 다녀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말한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단지 외국이 가고 싶다는 그런 1차원적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저 천치같은 저승사자는 왜 이해를 하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됐다. 말을 말자."
쯧- 대차게 혀차는 소리와 함께 뭐에 그리 성이 난 건지 푸른 화염을 일으키며 모습을 감추는 도깨비를 저승사자는 잠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렇게 온통 제멋대로인 도깨비를 감내하는 것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벌인가, 그 쯤의 생각을 하며 모자를 고쳐잡는데 마침 덕화가 들어오기에 여는 좀처럼 내질 않는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그 앞을 가로막고섰다.
"뭐, 뭔데? 뭐야 무섭게?"
늦게 들어온 덕화는 알리가 만무한데도 불구하고 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깨비의 빈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덕화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저 자가 왜 저러는지 덕화 너는 알아?"
저승사자의 입에서 나온 '저 자'가 제 도깨비 삼촌을 일컫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수 초의 시간이 걸렸다. 도대체 삼촌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끝방삼촌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덕화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두 사람, 아니 두 신은 인간들처럼 자주 티격태격하곤 했다. 치약을 중간에서부터 짰는지 아래서부터 꾹꾹 눌러짰는지로 몇 날 며칠을 말다툼하다 결국 치약을 각자 쓰기로 하였고, 신발을 바깥 방향으로 정리하는지 안쪽 반향으로 정리하는지로 신발가죽이 찢어지도록 싸우다 신발장마저 따로 사용한다. 뿐만이 아니다. 냉장고에 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큰지 야채주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큰지로까지 싸워대는 통에 늘 피해보는 건 중간에 낀 덕화였다. 그러니 저승사자가 또 저렇게 도깨비의 행동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면 덕화는 대답하기가 꽤 곤란한 것이다.
"뭐 또 삼촌이 주스에 손댔어요?"
"아니."
"그럼, 콩나물 불태웠어요?"
"그것도 아니."
그럼 대체 삼촌이 이번엔 또 무슨 일을 벌였길래 표정이 그러하냐 물으니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잖아. 저 자가. 답하기에 덕화는 그제서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뜩 뜨였다. 조금 전에 이 자리에 있던 도깨비의 표정과 덕화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이 별반 다를 것 없이 닮아있다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인식한 저승사자는 더더욱 싸늘하게 식어갔다. 저승사자의 발 밑이 하얗게 원을 그리면서 얼음바닥을 만들었다. 덕화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치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 끝방삼촌 왜 괜히 나한테 화풀이야. 내가 뭘 어쨌다구. 제발 무슨 일이든 두 분이 알아서 좀 풀라고 제발.
부풀려진 콧구멍 사이로 썽난 숨을 뱉어내며 저승사자는 다시 쿵쾅쿵쾅 소리를 내었다. 움찔하는 덕화의 어깨를 사정없이 퍽 내려치고는 상스러운 모자를 덮어쓰고 집을 나선다. 영 기분이 꿀꿀한게 썩 좋은 마음으로 망자들을 배웅하지 못할 것만 같은 날이었다.
*
저승사자는 모처럼의 느긋한 아침을 맞이했다. 야채주스에 빨대를 꼽고 폭신한 소파에 기대어 여유롭게 아침드라마를 보는 그런 아침말이다. 벽면 한가득 채운 커다란 브라운관에서 '소연이 당신 딸이에요-'를 뱉어내는 여주인공의 충격적인 고백에 놀란 저승사자가 쪽쪽 빨아대던 빨대도 놓치고 맹한 표정을 짓는데 언제 온건지 풀썩 소리를 내며 소파를 어그러뜨리는 도깨비다.
-절루가. 방해하지말고.
-TV 내 거야. 이 소파도 내 거고.
-이 집은 내 거거든? 당장 나가.
잔뜩 심통난 저승사자의 얼굴이 도깨비를 향해 휙 돌아갔다. 뭐라고 맞받아칠 줄 알았더니 또 예의 그 표정이다. 말하고 싶은 게 많은데 눌러담은 표정.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 인간들이 말하는 사춘기가 천년만에 온 것도 아닐테고 왜 이렇게 하나하나 안하던 짓이냔 말이다. 한참을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다 갑자기 먼저 미간을 팍 찌푸린 도깨비가 저승사자의 손에 들린 야채주스를 휙 가로챘다. 생각지도 못한 선제공격을 당한 저승사자는 얼이 빠진 얼굴로 어버버하는데 도깨비는 보란듯이 빨대를 입안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몇 모금 빨아들이지도 못한 채 곧바로 빨대를 뱉어내며 퉤퉤하는 꼬락서니를 저승사자는 한심하다는 듯 쏘아보았다.
"먹지도 못하는 걸 왜 욕심내? 멍청한 도깨비."
"뭐 얼마나 대단한 맛이기에 정인을 이 주스만도 못한 취급을 하나 싶어서 그랬다 왜!"
"뭐래."
도로 도깨비의 손에 들린 야채주스를 빼앗아 빨대를 입에 무는 저승사자의 얼굴이 시큰둥하다. 아니 시큰둥한 척 하고 있다. 화면은 이미 다 끝나버린 드라마가 앤딩크레딧을 올리고 있었지만 그것에 눈치채지도 못하고 몰두할 만큼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다 마신 주스는 바닥을 보이고 츄르르 의미없는 공깃방울소리만 내고 있었다. 저승사자는 이제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빨대를 의미없이 잘근잘근 짓씹었다.
너를 연모했고, 그런 너의 나라를 목숨걸고 지켰노라고. 가슴에 칼을 꼽은 못난 주군일지언정, 여즉 분노만큼 그 연심이 사그라들지 않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노라고. 그러니 제 눈 앞에 있으라 담담하게 고백하던 그 날밤의 도깨비를 저승사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아침저녁 문안인사를 나누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따위나 늘어놓는 그런 무미건조한 시간이 1년. 무슨 거사를 치루는 것마냥 흥건하게 땀이 베인 손을 마주잡고 가슴떨리는 입맞춤을 나누는 달큰한 시간이 1년.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이나 아찔하게 서로의 숨결을 나눠 가지고 살결을 맞댄 것이 1년이다. 그래, 가만 생각해보면 도깨비가 이상행동을 보인 건 우리의 관계가 변화된 그 맘 때쯤부터가 아닌가. 보통 이런 경우 드라마에서 보면...
-뭐야 설마 고작 야채주스에 질투라도 했다는거야 뭐야? 불순한 도깨비.
-다 들리거든.
저승사자는 괜히 달아오르는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여전히 시선은 브라운관을 향한 채였다. 누가 보았더라면 몇 백년 묵은 신들의 서툴은 사랑놀음에 한 껏 비웃었을 것이다.
"이 봐. 저승. 영화 보러갈래?"
"안 돼. 오늘 선약있어."
"거 좀 미루면 안되냐? 후배 차사 아무나 대타 좀 시켜."
"왜 꼭 오늘이어야 한다는 거야. 내일도 있는데."
"그래 내일은 있지. 그런데,"
-모레도 있고 글피도 있는데, 너는 없을 수도 있잖아.
자연스레 흘러나와 읽히는 도깨비의 마음과, 차츰 흐려지는 공기가 저승사자의 온 몸을 찌르고 들었다. 그것이 유한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아, 아무 말 못하고 달싹이는 붉은 입술 새로 뜨뜨미지근한 숨이 새어나왔다. 도깨비만큼은 아니지만 저승사자 역시 수 백년의 삶을 살았고 그 속에서 많은 만남과 많은 이별을 마주했다. 비록 그것들은 어떠한 인연도 없는 그저 망자를 인도하면서 생긴 찰나의 것들이었지만 그 잠깐의 이별 속에서도 아려오는 마음에 축 늘어뜨린 어깨로 퇴근을 하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 때마다 시원한 맥주 한 캔, 뜨끈한 달걀 내밀며 이별은 자신에게도 오랜 업이라 말하며 웃던 도깨비를 무심하게 지나쳤었는데. 하지만 덤덤하게 업을 들먹이던 도깨비의 속내는 결코 차가운 온도가 아니었을지언데. 대략 일 백년의 인간의 수명을 꽉꽉 채운 인연들에게 정을 주고 또 그 정을 거두고. 영영 끝나지 않을 태양아래 몇 백년이고 서서 무기력하게 바짝 타들어갈 도깨비의 유약한 등을 왜 몰라본 것일까.
"이럴 땐 그냥 저번처럼 그거나 해줘."
-이 무드없는 저승사자야.
"뭐?"
안아준다며- 어쩔 줄 몰라하는 저승사자의 두 팔을 쥐고 수평으로 벌려 낸 도깨비가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이나 쓸쓸했던 얼굴이 또 이렇게나 찬란해서는, 그 어떤 갈피도 잡을 수가 없도록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방황하는 깊은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깨비가 서늘한 저승사자의 뒷목을 감싸쥐고 제 어깨 위로 그러당겼다. 여전히 멍청한 저승사자는 양팔을 벌린 채 눈만 뻐꿈이고 있는 것이라 강제로 껴안은 꼬락서니가 되어버렸지만. 도깨비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아니면, 침대로 가도 좋고."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저승사자의 목덜미에 쪽-소리가 나도록 입맞추며 쐐기를 박자 그제서야 다급하게 마주 둘러오는 팔에 도깨비가 그만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한 두 손이 아프지 않게 도깨비의 등을 퍽퍽 두드린다.
아직은 곁에 있다는 것, 손 뻗으면 닿을 이 곳에 당신이 있다는 것. 그것이 태양열보다 더 뜨거운 숨결로 다가와 언젠가는 산산조각날 것을 알면서도 여즉 날 숨쉬게 해. 상냥한 꽃잎이 당신의 콧잔등을 간지르는 따스한 봄날에 이렇게 세게 마주안고. 그냥 그렇게 말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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