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대왕이 술에 취하면 일하는 저승사자들이 혼란이 와서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의 무덤을 서성였다고 하는
그런 설화를 보고 쓰게 된 글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한 염라는 이수혁씨입니다 ㅠㅠ 그냥 검고 붉은 도포가 잘 어울리셔서요. 별 뜻은 없구요.
깨비씨가 분량이 거의 없는건 기분탓이구요......네...
깨비사자염라
업보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없는 하루였다. 저승사자는 오직 명을 받고 움직인다. 하지만 요근래 그 '명'이라는 것이 사자의 상식을 넘어선 수준의 것이라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안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투명하게 비춰질 정도였다. 어떤 날은 인도해야 할 망자의 수가 일백에 달하여 하루종일 망각의 차를 달여야 했고 또 어떤 날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저승으로 간 망자의 이름이 명부에 적혀 있어 숱한 혼선을 빚기도 하였다. 하- 이 또한 감내해야하는 벌인가. 싶어 사자의 깊은 한숨이 땅거미와 함께 내려앉았다.
"격조수월하였구나."
갑작스레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사자는 들고있던 중절모를 떨어뜨릴 뻔 한 것을 겨우 고쳐잡고 다급하게 뒤돌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도포자락이 밤바람에 흩날린다. 동시에 은은한 구절초향이 스친다. 겨울에 피는 하얀 꽃이 꽃말과도 같이 순수하여 자신과 빼닮아 어여쁘다던 그 누군가에게까지 생각이 닿자 그제서야 사자가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염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듯 아파온다. 염라는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을 수놓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검은 도포 위에 수놓아진 붉은 꽃잎이 마치 검붉은 피를 울컷 쏟아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사자의 고개가 다시금 힘없이 떨어졌다. 의도치 않게 바들바들 떨려오는 몸을 감춰보려 주먹을 꼬옥 쥐어보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왜 이리 떠누.."
'내 너를 겁준 기억은 없는데. ' 염라의 손가락이 사자의 턱끝을 들어 올렸다. 사자의 붉어진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턱끝에 닿았던 손가락이 어느샌가 뺨을 어루르고, 한참을 배회하던 그것이 입술께에 다다랐을 때서야 사자는 잔뜩 굳어있던 몸을 움직여 급히 한 걸음 물러섰다. 염라는 갑자기 텅 비어버린 손끝의 차가운 공기를 매만지듯 훑어내리며 다소 자조적인 코웃음을 흘려보냈다. 염라의 까만 눈동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듯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바투 다가오너라."
"취하셨습니다.."
사자는 오직 염라의 명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 허나 굳이 이런 거추장스러운 상관관계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제가 부르면 곧잘 달려오던 아이였기에 염라는 지금 사자의 이 행동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일순 정적이 흐르고 미미하게 새어나오는 수선화주의 향기와 잔잔한 바람소리만이 고즈넉한 공간을 채웠다. 사자는 속이 울렁거려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았다. 창백해지는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던 염라의 눈썹이 뾰죡하게 뒤틀린다. 그리고 다시 발을 내딛는다. 한 발자국, 사자가 저로부터 물러선 딱 그만큼의 거리였다.
"그 치에게 더러운 물이 들었구나."
"..."
염라의 육체에서 뿜어져나오는 압도적인 살기가 공기를 무겁게 하고 호흡마저 앗아간다. 사자는 마치 숨쉬는 법을 잊어버린 아이처럼 힘겹게 숨을 고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고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지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아이다. 비틀린 기분이 끝도 없이 나락을 향해 치닫는다. 염라의 손끝이 다시 사자의 입술에 닿았다. 이제 이 입술은 더이상 저를 향하지 않을 것이다. 염라는 환하게 웃으며 그 얄궂은 입술을 잡아 뜯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자는 니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압니다..."
"아니, 너는 모른다."
두려움에 어깨를 바짝 움츠리면서도 그 작자를 감싸는 사자의 시선에는 한 치 미동도 없다. 그것이 예리한 발톱이 되어 염라의 심장을 긁어내린다.
"네 이름을 알려주랴?"
염라의 얼굴에 서슬퍼런 미소가 걸렸다. 이 아이를 담았을 그 눈동자를 도려내버릴까, 이 아이를 어루만졌을 그 두 손을 잘라내버릴까, 아니 애초에 없었어야 할 그 더러운 존재를 무(無)로 만들어버릴까 숱한 생각을 하였다. 허나 제아무리 염마왕이라 하더라도 옥황대천존현령고상제의 변덕으로 만들어진 그 존재의 생사에 쉬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그 자는 온 백성이 떠받드는 무신이었지. 허나 그 자의 어린 주군은 투기에 눈이 멀었던 모양이야. 유일하게 제 편일지도 모르는 신하의 심장에 칼을 꽂았으니 말이다."
"...."
"그 어리석은 주군의 이름은 왕여. 내 직접 그자에게 망각의 차를 내어주었지."
망자 모두에게 염마왕의 배려가 허락되진 않는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업보를 진 그 어린 왕에게 망각의 차가 내려졌다고? 아무리 신이 변덕이 들끊는 존재라하더라도 그런 만행을 저지를리 없다. 그것도 망자의 죄를 심판하여 엄중히 다스리시는 염마왕께서말이다. 온갖 의문이 사자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왜 그런 자에게 호의를 베풀었느냐 호기롭게 따져묻던 사자의 올곧은 눈동자가 곧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저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짓던 신의 얼굴도 사랑을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도 그와 나누었던 모든 행복한 시간들이 천천히 어둡고도 습한 진흙늪으로 잠식되어간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사자의 얼굴 위로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
세상 어느곳 하나 정붙일 데 없고, 이름조차 없던 허망한 세월 속에서 유일하게 제 옆을 지키며 온기를 나눠 준 사람이다. 허나 지금은 그런 그에게 고맙다 보답해주지도, 미안하다 사과의 말 한마디도 건넬 수가 없다. 자신은 그럴 자격조차 없는 존재다. 얼음조각이 할퀴고 지나간 듯 가슴이 아파왔다. 심장을 에는 듯한 고통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소멸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 때도 지금도 너를 품어줄 이는 나다."
그러니 여야, 돌아오거라. 염라는 여전히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여린 입술을 핥아올렸다. 사자의 눈은 이미 제 빛을 잃은지 오래였다. 완전히 포획된 제 사냥감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단정한 그 머리칼을 헤집고 더 깊숙히 입술을 파고들었다.
그 때였다.
콰쾅! 희번득, 포효하듯한 굉음이 사방에 울려퍼진다. 일순 사자의 몸이 흠칫 떨리며 눈동자에 따뜻한 불씨가 인다. 쯧- 염라는 불청객의 방문에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서슬퍼런 기운이 주변 공기를 다 태워버리기라도 할 듯 매워온다. 푸른 화염이 이글거리는 장검을 손에 든 장신의 인영이 서서히 그 검은 윤곽을 드러낸다.
ㅡ ' 저승이 많이 지루한가봅니다. 염라. 그렇게 구업을 쌓으시다가 발설지옥에라도 떨어지면 어쩌시려구요' ㅡ
"건방진 놈"
모든 진실을 마주하고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애달픈 마음.
제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뒤돌아 품에 안기고 싶은 간절함.
광기로 얼룩진 비뚤어진 집착.
결코 섞일 수 없는 감정들이 공기 중에 부닥쳐 흩어진다. 아득하고 무거운 침잠만이 세 존재를 둘러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