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오여림] 무향화 (無香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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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그 열린 문틈으로 화려한 비단 옷을 칭칭 감은 이가 들어선다. 고르지 못한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검은 그림자는 이 낯선 이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한다. 비단옷의 낯선이는 망설임없이 검은 그림자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복부의 깊은 상처가 무의식의 와중에도 고통스러웠는지 간간히 신음을 흘린다. 그런 검은 그림자의 송골송골 땀맻힌 이마며 검은 핏덩이가 엉겨붙은 상처를 낯선이는 정성스레 쓸었다. 그리고 눈물도 언뜻 내비친듯도 하였다. 곱디 고운 손으로 눈물을 훔친 낯선 이는 검은 그림자의 가슴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하지만 깨어날 낌새를 내비추지 않는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어보아도 소용이 없다. 결국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옷을 벗겨 상처부위에 혈갈(血竭)가루를 천천히 펴발랐다. 혹여나 잘못되기라도 할까 애지중지하는 그 고운 손이 애처롭기까지하다. 그러다 품 속에서 가져온 옷을 주섬주섬 꺼내어 갈아입히려 검은 사내의 피묻은 적삼을 벗겨내려는데 갑자기 붉게 물든 거친 손이 덥썩 손을 잡는다. 놀란 낯선 이는 어깨를 흠칫 떨며 눈을 땡그랗게 떴다.


"뭐야.."

"이..이보게 걸오. 이제 정신이 드는가? 이제 괜찮은건가? 그런겐가?!!"


지친기색이 여력한 풀려있는 눈매로 걸오는 뒤늦게서야 제 앞에 있는 사내가 여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제서야 놀란 걸오는 제 차림새를 빠르게 훑었다. 어설프지만 상처를 치료한 흔적과 제 몸을 깨끗히 닦아내기라도 한건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피묻은 비단쪼가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허나 어찌하여 여림이 제가 이 곳에 있음을 알고 온겐지 혹 자신이 홍벽서(紅壁書)임을 눈치챈 것은 아닌지 의구심으로 머릿속이 가득차들어갈 때쯤 여림은 평소의 행실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나긋하게 한 마디를 거들어 주었다.



"걸오. 나는 말이네.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네. 그러니 자네도 아무 것도 답하지 말게."

"..."


여림은 걸오의 옷을 마저 갈아입히려 손을 다시 뻗었다. 걸리적거린다는 듯 걸오는 그 손을 한 번 마다하였으나 여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한 번 해사하게 웃으며 다시 손을 뻗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손길을 받아준다. 벗겨낸 붉게 물든 적삼에서는 땀냄새와 피냄새와..그리고 걸오..그만의 냄새가 났다. 여림은 그 적삼을 코에 갖다대곤 킁킁거리며 냄새맡는 흉내를 내더니 아이쿠 걸오 너무 지독하이- 하며 애써 농을 건넨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대꾸가 없다. 옷을 다 갈아입힌 여림이 불쑥 일어나 걸오를 향해 등을 내보였다.


"오..오늘은 내 방으로 가세. 대물이나 가랑이 알면 곤란하지 않은가."

"비켜라.."


걸오에게 보기좋게 엉덩이를 걷어차여 앞으로 고꾸라진 여림은 너무하이- 하고 징징 짜는 시늉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걸오는 쩔뚝거리면서도 금새 여림을 자리에 남겨둔 채 앞장서 밖으로 나가버린다. 쪼르르 따라나가보지만 벌써 자취를 감춘 채다.

중일방으로 돌아가는 여림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상처가 깊었다. 걸오는 언제나 죽을 힘을 다했다. 비록 그 앞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라 할지언정 당당하게 그 속으로 뛰어들 이다. 한 시도 걸오를 걱정하지 않은 밤이 없다. 홍벽서로 떠들석한 장안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옆구리에 달라붙은 계집마저 마다하고 종종 걸음으로 성균관으로 돌아왔던 여림이다. 보고싶었다. 한 번도 걸오의 앞에서 혼내를 비춘 적은 없지만 좋아했다. 무심하고 거친 사내이지만 다정한 마음을 가진 걸오를.

품어서는 아니 될 연심(戀心)이었다. 여림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리고 훌훌 털어내버리겠다는 듯 중일방으로 돌아가는 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던 걸오의 배가 생각나 마치 자신이 아픈 것 같은 느낌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이내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지워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중일방문을 벌커덕 열고 들어와 방바닥에 주저앉을때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울음때문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눈물과 먼지가 범벅이 되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눈물을 따라서 이제 입에서도 울음소리가 터지려는 찰나였다.


"얼굴이 왜 그 모냥이냐?"

"..거..걸오?!"

"뭘 그리 놀라? 시끄럽다. 잠 좀 자자."


곧 터질 것 같던 울음이 쑥 들어갔다. 눈가의 눈물도 어느 샌가 바짝 말랐다. 북바쳐 오르는 감정이 머릿속을 치고 올라왔다. 여림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걸오의 옆에 자리를 펴고 누워 어둔 창밖을 내다보았다. 새벽에 불기 시작한 바람에 나뭇가지는 가벼이도 울어댄다. 여림은 적삼을 풀어헤치고 고른 숨소리를 내뱉는 걸오를 향해 반쯤 모로 누웠다. 손바닥을 곱게 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풋 보이는 이마에 갖다대본다. 그리고 천천히 상처 위로 손바닥을 옮긴다.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의 고요함이 짙은 밤그림자와 하나가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가, 깜깜한 하늘은 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는 구름따라 속내 알 수 없는 눈만 꿈뻑인다.


"..또 모란각 기생년 품내가 그리운게냐?"

"아..거..걸오 자네 깨어있었던 겐가? 이 여림이의 손길이 싫지는 않았나보이"

"미친놈"


여림은 처음으로 걸오 문재신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버지를 따라 대사헌 문근수댁으로 갔을 때 였다. 종놈이 대문을 열어 마당으로 인도해 주었는데 그 마당가에 한 아름이 넘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더랬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 팔자좋게 누워있던 아이. 여림은 그 나무그늘 아래로 가 한참을 말없이 그 평안한 모습을 지켜봤더랬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흩날리고 그 속에 녹아든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눈을 뗄수가 없었더랬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게 표정하나 없는 서늘한 얼굴로 '넌 누구냐'고 묻는데 그 무심한 눈이 어찌나 추워보였던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무심한 눈빛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실없는 놈. 뭐가 그리 좋으냐"

"이보게 걸오. 그거 아는가? 난 자네가 참 좋으이."

"..."

"걸오..세상에서 가장 건너기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무 거리낌없이 흘러가는 사람의 마음의 강이라네."

"천하의 여림 구용하가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더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한들 역류한다 한들 무엇이 그리도 걱정이냐. 본래의 뭍으로 돌아가 다시 천천히 가르고 나아가면 그만인 것을."

"참..자네다우이.."


여림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걸오의 이부자리 가운데까지 기어들어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남았다. 끌어 덮은 얇은 비단이불에서는 결코 날리 없는 그리운 흙냄새가 맡아졌고, 파고든 사내의 품속에서는 아득한 따스함이 느껴졌다. 머리가 아프고 열기가 올랐다. 떨리기 시작하는 몸은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꾼 두려움 탓일뿐 그토록 애뜻한 이의 품이 슬퍼서가 아니다. 한 홉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슬픔은 연모하는 이의 품속에서 이토록이나 무력했다. 걸오는 결코 그 떨리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얼굴을 꼭꼭 숨긴채 더욱 더 파고드는 이의 비단자락을 살며시 어루만질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조용히 흔들리는 강물소리와 유유히 강을 건너는 사내의 노젓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듯 하였다.





빛깔은 고우나, 본래의 향은 없구나.
어루만져 주지 않는 내가 밉더냐.
시들어가는 모습에 서글플만도 하건만,
그 사그라드는 아름다움에 눈시울이 적셔온다.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애닮은 이의 마른 눈물은 정처를 알 수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