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녀석을 오늘 처음 대면했다. 고드릭 배역에 19살짜리 꼬마녀석 하나가 캐스팅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딱히 내 스스로가 알려고 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지만. 막상 리딩 연습이 잡힌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조금씩 녀석이 궁금해졌고, 실제로 생김새를 보았을 때 상상 의외의 모습에 짐짓 놀랐다.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아 표정없는 얼굴로 시선만 대본에 떨군 모습이 제 나이 또래 아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간히 쉬는 깊은 한숨은 어딘가 쓰고 떫어서 내 몸이 저릿해져오는 것 같았다.
내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을 때 그제서야 녀석은 고개를 들어 보일듯 말듯한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곤 다시 대본에 시선을 박아버렸다. 숫기가 없는 건지, 성깔이 있는 건지. 제법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은 초짜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구석자리에서 남과 얽히기 싫다는 듯 고립되어 있는 탓에 주위 공기가 무거웠고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거부감은 표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거칠게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는데 꼬마는 전혀 관심없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나는 평소에 딱히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유의깊게 살피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대본을 읊는 중 몇 번이고 꼬마의 자그마한 몸짓, 그리고 오물거리는 입술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제법 시건방진 놈일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골적인 내 시선을 챈 녀석의 얼굴이 조금 전부터 버얼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순진하고 천진한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리딩연습이 끝나고 귀까지 벌개진 채 쭈뼛거리며 일어나는 녀석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서 쳐다보는 데 녀석의 손목을 잡은 내 손이 또다시 저릿저릿하다. 당황한 녀석이 손에 꼭 쥐고 있던 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서로가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데 팔이 긴 내가 좀 더 빨랐다. 허공에 헛손질만 한 녀석은 그게 또 무안했는지 재빠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가 탁자모서리에 머리를 세게 쾅 찍고야 만다.
"윽!.."
순간 우스꽝스러운 녀석의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 피식하고 코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러자 내 손에서 잽싸게 자신의 폰을 낚아채고는 입술을 쭉 내민다. 아..역시 꼬마는 꼬마구나..
"이 봐..내가 너만한 동생이 있어서 귀여워서 그러는 거니까 그렇게 당황할 거 없다구."
"... ..."
"어서 준비하고 나오라구 꼬마야, 촬영해야지."
여전히 말없이 우뚝 서 있는 녀석의 귀여운 갈색 밤톨머리를 손으르 쓱쓱 엉클어뜨렸다. 상상했던대로 보들보들한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녀석의 움츠린 어깨를 두 어번 톡톡 쳐 주고 촬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 내내 내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왼쪽으로, 아니 오른 쪽으로 조금만 더 앞으로. 그래 그렇지.!"
엉거주춤하게 태양을 등지고 서선 시키는 대로 요리 갔다 조리 갔다 잘도 움직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더욱 장난끼가 발동했고 녀석이 심통난 얼굴로 쿵쿵 부러 발소리를 크게 낼 때서야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지금 이 상황은 '고드릭 앞에 무릎을 꿇고 운다' 라는 대본의 단 한 줄로 인해 벌어진 소동이다. 곧 해가 지고 슛 사인이 들어오겠지만 그 전에 위치선정이라던지, 대사라던지를 한 번 맞춰봐야 했기에 녀석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그 놈의 태양이 눈을 콕콕 찔러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선배에 14살이나 위인 내 말을 무시할 순 없었을 테고 잔뜩 심통이 난 녀석이 뾰루퉁한 얼굴로 서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태양으로 인해 후광까지 비추는데 그 모습이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왜 웃어요..."
나도 모르게 표정이 여실하게 드러나버렸나보다.
"꼬마 니 표정이 우스워서 말야."
"꼬마 아니고 앨런 하이드라는 말짱한 이름있어요 아.저.씨."
이제 겨우 마음을 열고 대화의 장을 열어보려나 했더니 아저씨랜다. 천진하고 순진해보인다는 말은 취소다. 아주 약은 꼬마다.
"그리고, 아저씨도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웃겨요."
당했다. 완벽한 패배다. 뭐라고 반박할 여지도 없이 말이다. 14살이나 어린 애랑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작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버렸다. 그러자 녀석이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여 속삭인다. '농담이에요. 아래서 올려다 볼 땐 목이 아파서 잘 못봤는데 이렇게 자세히 보니까, 잘생겼어요...' 란다. 갑작스러워 멋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꼬마의 작은 손길, 그 감촉이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