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가 끝이라니 우울 ㅠㅠㅠㅠㅠ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3
이름 왕여. 나이 26세. 17세에 뺑소니사고로 시력을 잃음. 부모와 남동생이 하나 있으나 별거중. 여의 신상이 들어 있는 종이서류를 넘기는 신의 손가락이 짐짓 진지하다. 생각했던 것만큼 어리지 않아 놀라기도 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불행해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시력을 잃기 전의 여의 모습으로 보이는 사진 몇 장이 데스크 위로 후두둑 쏟아진다. 교복을 입은 에 띈 모습, 지금보다 더 생기발랄한 미소.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다던 명석한 두뇌. 그 누구보다 빛나고 찬란했던 순간들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볼 수 없는 그런 모습들에 신은 씁쓸함을 느꼈다. 그리곤 이내 자켓을 집어들고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미친듯이 보고싶었다.
'김신' 이름 두 자가 하루 온종일 머릿속에 둥둥 고동치듯 떠다니는 통에 여는 몇 번이나 교열을 재점검했는지 모른다. 고작 이름 두 자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제 안을 비집고 들어와 난동을 피우는 것인지. 이렇게까지 사람의 품이, 온정이 그리웠던 것일까. 목소리가 참 좋았는데, 몇 살일까, 깡패면 시커먼 옷 입고 밤에만 활동하겠다, 밤되면 다시 만날 수 있나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퇴근하고 집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하루의 피곤이 싹 가실 정도로 순간의 쾌락을 안겨다 주곤 한다. 하지만 여가 맥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취하고 나면 마치 어릴 적 부모님 손잡고 탔던 놀이기구에 대한 추억이 떠올라서였다. 부웅 뜨는 감각이 퍽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오늘 역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은 날들중 하나였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고르는 여의 손길이 꽤나 진중했다. 아직 한국은 제대로 된 점자시스템이 없어 '음료' '맥주' 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이 전부였기에 오렌지 쥬스가 마시고 싶어도 떄떄로 흑맥주가 마시고 싶어도 스스로 골라낼 수 없는 랜덤뽑기나 매 한가지였다. 하지만 거의 매일 오다시피하니 음료배열을 거의 다 외워버린 여에게 있어서는 크게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거기 이쁜 형."
맥주가 담긴 봉지를 손목에 걸어 쥐고 지팡이를 움직이려는 찰나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며 뻗어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여는 그만 지팡이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허리를 숙여 지팡이를 주우려는데 갑작스런 손길의 주인공은 그 행위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될 거 아냐."
코트 뒷덜미를 낚아채듯 반강제로 여의 몸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들이 마치 조롱하듯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어깨를 주물대는 행동이나 뺨을 쿡쿡 찔러대는 행동에 여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깡패아저씨가 무서운 사람한테 말대꾸하지 말고 더러운 사람은 피하라고 했었는데 이들은 더러운 건 아닌 거 같고 그다지 무서운 것 같지도 않아 보이니 가만히 있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여의 얼굴이 굳은 결심으로 빛났다.
"학생들 지팡이 좀 주워줄래?"
"이 새끼 뭐래냐? 이쁜 형. 들어가서 담배 한 갑 사다주면 지팡이 주워줄게."
다시 한 번 낄낄대기를 반복한 이들은 그제서야 본론을 꺼내들었다. 여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올해는 삼재인 것인가, 두 눈을 잃은지 십년가까이 살 동안 이런 최악의 사태를 겪는 일은 몹시도 드물었는데, 무려 하루 걸러 하루만에 또 생기다니 이것은 신의 농간인가. 아..그러고보니 신은 신이었다. 김신씨를 만나고나서부터 시작된 저주인 것 같으니.
"싫은데?"
하-하고 기가막히다는 듯한 뉘앙스의 소리가 여의 귓전을 때렸다. 하지만 여는 전혀 개의치않았다. 저들이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장애인이라고 해서 몸사려가며 머리에 피도 안마른 어린 것들의 호구가 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뉴스같은데서 담배피고 있는 미성년자를 지적한 어른이 맞아서 병원에 실려갔다더라 하는 기사를 접하기는 하였지만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자존심쪽이 좀 더 우세했다. 그리고 그 자존심은 결고 좋은 결말 쪽으로 여를 이끌어주지는 않았다. 멱살을 쥔 누군가의 손에 힘이 실린다.
"이 형 안되겠네."
"그래, 안되겠네 너희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질적인 목소리에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여의 고개 역시 소리가 난 쪽으로 비스듬히 돌아간 상태였다. 저 새끼는 또 뭐냐며 큰소리를 텅텅 치던 녀석들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정장을 빼입은 한 남자가 비스듬히 가로등에 기대서서 여유로운 손짓으로 담배를 꺼내무는데 그 모습이 누가 봐도 나 위험한 사람이다라는 아우라를 뿜어냈기 때문이다. 눈을 내리깐 채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깊게 한 번 필터를 빨아당긴다. 자욱한 연기가 가로등 불빛 아래 흩어졌다.
"내가 거기 이쁜 형한테 볼 일이 좀 있는데, 어떻게 너희들도 같이 볼까?"
잡았던 멱살을 팽개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도망치는 소리가 번잡하게 울려퍼졌다. 여는 잡혔던 멱살 부근의 깃을 정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또 다시 지팡이를 주워 손에 쥐어 주는 신의 손길을 느끼며 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왜 하필 이 순간에 신의 입에서 나온 '이쁜 형' 이라는 단어가 동동 떠다니는 건지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겁이 없어 너는."
"죄송해요.."
사실 마음 속으로는 왜 죄송해야하는지 전혀 납득이 되질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신의 앞에만 서면 여는 한없이 작아지고 기대고 싶고 고맙고 미안하고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여는 반갑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맥주봉지를 눈높이까지 들어 달랑 흔들어 보인다. 신은 대충 담배를 비벼끄고는 그 봉지를 빼앗아 들었다.
신의 손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끌려온 곳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놀이터였다. 도대체 얼마만에 와보는 곳인지 특유의 눅눅한 흙냄새가 은은하게 심장에 저며든다. 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늘 혼자 집에서 마시던 맥주를 이렇게 누군가와 나란히 함께 앉아 나눌 수 있게 되리란 걸 상상이나 했을까.
"근데, 우연이에요?"
"뭐?"
"매번 저 구해주시는 거요."
신은 망설였다. 우연이었다고 그냥 쉽게 속이고 넘어가면 그만일 뿐인데도 저 텅 빈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넘어가 줄텐데도 어째서 여의 앞에서는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건지. 우연이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스토커로 오인받기 딱인 상황이고. 괜히 죄없는 맥주캔만 만지작거리며 침묵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여가 먼저였다.
"좋았다구요. 우연이든 아니든. 다시 만나서 반갑고."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의심없이 따라와?"
"좋은 사람이요."
신은 말문이 막혔다. 아마 조폭한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세계를 통틀어 제 앞에 있는 사람 단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자신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면 그 때도 그는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해줄 까.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데 마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만들어버리는 여의 올곧은 감정에 신은 괜한 죄책감에 쿡쿡 찔리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근데 뭐라고 불러야 해요? 깡패아저씨? 김신씨? 형님?"
"뭐?"
신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맥주캔을 손에서 놓칠 뻔 했다. 수석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더니 눈치가 귀신같이 빠르고 영리하기까지 한 여를 신은 뚫어지게 바라봤다. 결코 그 눈이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그 눈동자가 왜 보이지 않는 어떤 것까지 다 담아낸 큰 바다처럼 깊고도 깊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 드라마같은데 보면 막 조폭들이 형님 형님 하잖아요. 진짜 그런가 싶어서요. ."
푸흐흐-하고 크게 터진 웃음소리가 빈 놀이터를 쨍하게 울렸다. 순간 형님형님하고 따라다니는 여의 모습을 상상해버린 탓이었다. 이걸 당돌하다고 해야할 지 엉뚱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귀엽다고 해야할 지 신은 퍽이나 난감했다.
"몇 살이에요?"
"서른넷."
"혹시 실례가 안되면요..연락처 물어봐도 돼요?"
재차 거절하셔도 돼요- 라고 덧붙이는 여를 멍하니 바라보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신은 순순히 번호를 불러주었다. 대포폰이 아닌 사적인 번호를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이고 그 일부의 한 조각으로서 여가 들어왔다는 것에 신은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단지 숫자 몇 개에 뭐가 그리 좋은 지 환한 표정으로 번호를 저장하는 여의 얼굴에 생기가 올랐다. 또 그 모습이 뭐가 그리 좋은지 신의 얼굴에도 역시 따뜻함이 비쳤다. 맵싸한 겨울 바람, 흙냄새에 묻어나는 정취, 개운한 맥주 한 잔, 그리고 옆을 지키는 온기. 모든 것이 완벽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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