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설레는 관계까지로 5화를 마지막으로 하려고 했었는데.....
그냥 그렇다구요...요즘 포켓몬고에 빠져서 진도가 느리....흠흠.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5
사각사각 서류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서류를 넘기는 신의 기나긴 손가락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시큰둥했고 김비서는 부동의 자세로 그 옆을 지키고 섰다. 김도영, 그의 직책은 비서였지만 사실 그것은 겉치레일 뿐 조직의 중심부에 선 넷 중의 한 명으로 탁월한 두뇌와 냉정한 판단력으로 조직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있는 핵심인물이었다. 셋과는 달리 유일하게 다른 고아원 출신이었지만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고 혈쟁(血爭)에서 살아남은 후로 도영은 김신이라면 목숨도 불사하며 지옥이라도 따라가겠다는 의지와 충성을 보였다.
"더 깊이 파. 더 깊숙히."
"네, 알겠습니다."
가벼운 목례를 마친 도영은 군더더기 없는 몸동작으로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신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서류에는 박사장이 유신에 뿌린 피라미들의 목록과 그들의 최근 행적을 낱낱히 조사한 결과가 나열되어 있었다. 제법 공을 들여서 꽂았는지 생각보다 덜 멍청해 보이는 이들이었지만 이 정도로 틈이 생길 유신이었다면 벌써 가루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유신을 낮잡아 보았고 그 댓가는 곧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오는 것. 제 손과 발이 다 잘려 나가 피범벅이 되었는데도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깊은 늪을 만드는 것. 그것이 신의 잔혹스러운 성정이고 특기였다. 클라이막스로 가려면 아직 두 어달은 더 필요했지만 신은 벌써부터 겁없이 달려든 개들을 사냥할 생각에 조금은 들뜬 기분이 들어찼다. 그리고 설레는 이 기분은 자연스럽게 여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갑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어진 신은 전화기를 들었다.
"뭐하고 있었어?"
"아, 막 외출하려던 참이었어요."
"어딜?"
"부동산이요.."
어떤지 평소와 다르게 추욱 늘어진 목소리와 분위기가 신은 내심 마음에 걸린다. 잠 든 여의 입술을 몰래 훔쳤던 그 날 이후로 자신의 마음을 확실이 인지하게 된 바로 그 날 이후로 신은 여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아이에게 자신이 가진 어둠이 묻어나기라도 할까 죄책감에 떨다가도 되려 물들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고작 우울한 목소리를 한 번 들었을 뿐인데도 이렇게도 심란해지는 마음이 신은 신기하고도 낯설다.
"갑자기 부동산은 왜?"
"아..사실은..그게.."
뜸을 들이는 것이 영 수상쩍다. 여가 자신에게 숨길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진짜 제 성적 취향을 완벽하게 파악한 상대 조직에서 스파이로 보낸 것이기라도 한 것인가 허무맹랑한 상상마저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재촉하듯 목소리를 깔자 그제서야 여가 차분히 이야기를 쏟아낸다. 여의 집 주변이 재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고 그 여파에 집에서 쫓겨나기 일보직전인지라 갑작스러운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신은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형이라고 따를 때는 언제고 왜 이럴 때는 자신에게 기대오지 않는건 지, 그것이 여의 곧은 성격인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똥고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운한 마음이 컸다.
"기다려. 내가 지금 갈테니까."
"네? 아니 혼자가도.."
"기다리라고 했어."
뚝- 급하게 끊긴 전화를 멍하니 들고 있다 잠시 후 정신을 다잡은 여는 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내리는 밤의 첫만남 이후로 처음으로 들어보는 신의 낮은 음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에게 뭔가 실수로 잘못 말한 것이라도 있나, 아무 말도 안한 거 같은데..고심하는 여의 표정이 한없이 어둡다. 그 '아무 말도 안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성난 손길이 고요한 방안을 정신없이 울려댔다. 신의 전화를 받을 때의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여는 깜짝 놀라 급하게 일어나느라 발을 헛디딜 뻔 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말릴 새도 없이 훅 들어오는 담배향이 자신을 스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어안이 벙벙한 여는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형, 갑자기 무슨..."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밀고 들어온 신은 한동안 정적을 유지했다. 앞이 안보이니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여가 괜히 불안함을 느낄 때 즈음 신이 통화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덕화. 문자로 주소 찍어줄 테니까 당장 튀어와."
여는 이 상황이 굉장히 낯설었다. 신은 한 번도 여와 통화를 할 때든 이야기를 나눌 때든 강압적인 어조나 분위기를 만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그것도 일과 관련된 사람에게 입을 떼는 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제법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득 정말로 신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대한 고민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여는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눈을 잃고 난 뒤로는 직접 겪고 직접 느끼고 부닥쳐 본 결과만을 믿기로 스스로에게 다짐했었기에.
"저기 형..무슨 일이에요? 누가 와요?"
"중요한 물건, 필요한 물건만 챙겨."
무작정 들어와서는 동문서답만 하는 신 탓에 여는 슬슬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더듬 더듬 신의 옷자락을 잡아 쥔 여가 애매한 방향으로 고개를 들더니 빠안히 쳐다 본다. 침묵시위라도 하듯이 입은 앙 다문채로. 그것을 가만히 마주 보던 신이 하- 깊은 탄식을 뱉어내며 미간을 꾸욱 눌렀다. 조금 전까지 무엇에 그렇게도 화가 났었는지 까맣던 시야가 이제서야 하얗게 트이고 당황과 염려가 담긴 여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사 갈거라며."
"그래서요?"
"갈거야 지금. 내가 사는 집으로."
"네? 갑자기 상의도 없이 어떻게.."
"나랑 상의할 생각은 있었고?"
정확하게 펙트를 집어내며 콕콕 찌르는 신의 말에 여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신과의 대화 속에서 왜 통화할 때부터 신의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왜 목소리가 평소와 달라졌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사실 여도 집주인으로부터 재개발건으로 전화를 받았을 때는 많이 당황스럽기도 했고 고민도 많았다. 앞도 못보는 자신이 빠른 시일 내에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수 있을까. 사기를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꼭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힘든 사람한테만 이런 시련이 오는 구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여는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어지지는 않는 성격으로 특히 자존심이 아주 센 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웃음이 많고 애교도 많고 어리광도 심해 늘 강아지처럼 사람 손을 타곤 했었는데 그런 큰 사고 이후로 여의 모든 일상이 역변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동정어린 시선과 손길이 와닿았지만 곧 그 손길들은 하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여에게 귀찮음을 느꼈고 그렇게 친구도, 가족도 결국 주변 사람 모두가 자신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 공허함과 외로움을 너무나도 잘 아는 여는 될 수 있는대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먼저 손을 내미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는 내제된 마음이 고스란히 여의 성격조차 바꿔버린 탓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먼저 기대오지 않는 애잖아 너."
"무슨 말이 그래요?"
"아니야?"
무슨 말이라도 되받아쳐야 하는데 그러고 싶은데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아 여는 입술만 달싹였다. 무서우리만치 자신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신에게 화가 나는 것 같은데 또 그렇지 않은 것도 같고 표현하기 어려운 모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괜히 죄없이 붙잡고 있던 신의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손을 떨군다. 꽁꽁 숨겨놨던 자신의 치부가 훤히 드러난 기분은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시무룩하게 늘어진 여를 바라보는 신의 마음 역시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가 서툰 것은 비단 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신 역시 배려, 위로, 친절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인지라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어찌되었든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것이니 신은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고집도 좋고 자존심도 좋고 다 좋은데 주는 건 그냥 받아."
"그치만.."
"이건 그냥 내 호의야. 호의도 마음에 안들면 그냥 납치라고 쳐."
여는 그만 피식-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납치라니,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자연스럽게 뱉어내는 신이 너무나도 그다웠기 때문이다. 냉랭했던 분위기는 어딜 가고 금새 화사한 미소를 뿜어내는 여를 바라보는 신의 얼굴에도 따스함이 찾아왔다. 자동으로 올라가는 손이 여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헝클인다. 습관이 될 것만 같았다. 여는 신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부분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매만지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어색한 발걸음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챙길 것이라고 해봐야 통장이나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기에 수월하게 일은 진행되었다. 대충 챙겨진 짐가방을 빼았다시피 가져간 신이 성큼성큼 앞장서 트렁크에 싣는다. 그래도 혼자서 몇 년을 살았기에 정이 들었을 법도 한 집인데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해서 여는 보이지도 않는 집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한 걱정과 설레임을 담아 조심스레 지팡이를 더듬었다. 차문을 열고 집앞에서 기다리던 신이 여의 손목을 잡아 다치지 않도록 천천히 옆좌석에 앉혔을 때 즈음 때맞춰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온다. 다급하게 차에서 내린 덕화가 신을 발견하고 다가오려는 데 손짓으로 가볍게 제지한다.
"잠깐만 기다려."
고개를 끄덕이는 여를 뒤로 하고 덕화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덕화는 신의 차에 탄 상대를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여의 정체를 아무에게나 들킬 수가 없기도 하고 어차피 한 집 살면 알게 될 사이이니 덕화를 부른 것이긴 한데 대책없이 나불대는 주둥아리를 보니 이것이 정말 잘한 선택이 맞나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때 그!! 뭐야? 인사 안시켜줘요?"
"그냥 아주 세상하고 인사 시켜줘?"
금새 덕화의 어깨가 쭈굴하게 쪼그라든다. 사실 이미 덕화는 약간의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골목 어귀를 들어오면서 신이 세상 처음 보는 다정한 얼굴로 여를 차에 태우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소중한 것은 꽁꽁 숨겨두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 든다. 이 쪽 방면으로는 영 둔한 신은 자신의 감정을 덕화에게 완전히 들켰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겠지만 덕화는 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거야 저 아이."
덕화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요새와도 같은 집에 다른 누군가가 발을 디디는 것은 가족을 구성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고 식구를 제외하고 누군가를 극심하게 챙기는 신을 본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덕화는 괜시리 신의 뒷 편으로 힐끔 보이는 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하얗게 빛이 난다.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지만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것도 같아 덕화는 히죽거리며 신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이쁘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해주더니 더럽게 이쁘고 찬란하게도 빛나네.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꾸욱 삼켜낸다.
"3시간 줄게."
"뭐..뭐를요?"
"저 아이가 살던 방 구조 그대로 내 방 옆방으로 옮겨 놓는 시간."
"와!! 그게 말이 돼요? 형!! 형!! 회장님???!!"
칼같이 뒤돌며 '5분 지났네. 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 신을 덕화는 세상이 다 무너지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족이고 뭐고 다 뒷전이라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며 투덜거리는 덕화의 입이 바쁘다.
신의 집은 이미 손보지 않아도 될만큼 훌륭하게 인테리어된 게스트룸이 많았는데 굳이 신이 신경써서 똑같은 구조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다 여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집의 큰 틀은 바꿀 수 없겠지만 최소한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될 자신의 방에서만큼은 불편함이 없었으면 싶었다. 살던 방과 똑같이 해둔다면 새롭게 가구나 구조를 외우고 연습하지 않아도 빨리 적응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단순한 방법이었는데 이것이 잘 통할지는 장본인을 데려다 놓기 전까지 미지수였다.
"누구에요?"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시킬게."
차 시동을 걸며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 본 신의 얼굴에 난감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4시 10분. 다소 애매한 시각을 가르키는 바늘탓이다. 집단장을 마치기까진 시간이 한참 남았고 저녁을 먹자니 너무 이르고 어찌해야할 지 망설이던 신이 결국 여에게 선택권을 넘긴다.
"뭐 하고싶은 거 없어? 기분전환겸."
"으음..드라이브요."
'나무가 많은 곳이 좋겠어요-' 덧붙이는 여의 말에 이파리 하나 없는 겨울나무가 있는 곳을 왜 찾나 싶어 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여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드라이브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즐길 나이가 되기도 전에 눈을 잃었으니 말이다. 어렸을 때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이 뚜껑열리는 스포츠카따위를 타고 꼭 확 트인 해변가나 울창한 숲 속을 내달리는 씬이 나왔는데 커서 꼭 해봐야지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미미하게 남아있었다. 학교 운동장에만해도 흔해 빠진게 나무였는데, 그 땐 벚꽃이 피면 봄이구나, 단풍잎이 떨어지면 가을이구나, 잎사귀나 열매의 색상변화로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온통 까만색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나무가 많은 곳으로 가고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에 접한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자신만의 나무 한 그루가 마음 속에 담겨 있고 그것을 곡으로 표현해낸다는 내용이었는데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으로 느끼는 그 나무 한 그루는 어떤 느낌일까 계속 궁금했던 차였다.
"다왔어. 나무가 아주 많아. 잎사귀는 없지만."
"창문 열어도 돼요?"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신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말없이 창문을 내려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콧망울에 맺히듯 다가왔고 여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손을 뻗는다. 나뭇가지 사이를 심호흡하듯 배회하는 바람소리, 텁텁한 흙과 섞인 쓸쓸한 냄새, 혹독한 추위를 치열하게 견뎌내는 덧없는 정취. 정말로 그랬다. 눈으로는 절대로 느낄 수 없을 나무의 속삭임이 새까만 세상을 오색찬란하게 빛낸다. 여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린다.
"사실은 저 이런 거 처음해봐요."
"..."
"어릴 때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이런 거 해봐야지 했었거든요."
나긋하게 울려퍼지는 여의 목소리에 신은 여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눈꽃같이 새하얀 피부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꿈을 꾸듯 감긴 눈 위로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고요하게 잠긴 그 얼굴을 바라보던 신은 문득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오고싶었을 여의 그 어린 꿈을 자신이 방해한 것은 아닐까. 굳게 감긴 그 눈으로 여가 보고 있는 세상은 후회일까, 원망일까 그것도 아니면 슬픔일까. 그 세상에 단 한 줌만큼이라도 좋으니 자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왠지모르게 초조하고 답답해진 신은 품을 뒤져 담배를 찾았다. 불을 붙이려고 지포라이터를 드는 데 신은 끝내 그 불을 붙이지 못했다.
"지금 내 옆에 형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신은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아까까지 앙상하게만 보이던 나뭇가지가 생명의 고동으로 가득 차오른다. 자신과 함께 한다면 여가 평생 안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온통 어둠뿐인 자신에게 이 아이의 옆에 설 자격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수만 있다면, 신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이 아이의 손을 절대로 놓고싶지 않았다. 영영 빛을 가질 수 없어도 좋으니 그림자로라도 곁에 머무르고 싶다고 신은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잔잔한 물결처럼 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보드랍게 흩날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신의 손가락이 따뜻하게 에워싸며 헝클였다. 아..역시나 습관이 되어버렸다. 둘의 마음에 조금 이른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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