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어둡게 흘러가지 않고 가볍고 달달하게 깨볶는 둘을 보고싶은 헛된 희망....
영원히 꽁냥대기만 했으면 좋겠는 두 사람..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4
평소에는 있으나 마나한 애물단지같은 폰이 요근래에는 그 존재감이 너무 크고 수시로 신경이 쓰여 신은 몹시 난감했다. 정작 번호를 따 간 인물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걱정마저 생기려고 할 때 즈음에서야 잔잔한 벨소리와 함께 액정에 낯선 번호가 띄워진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나, 신은 막상 기다리던 전화가 울렸는데도 불구하고 짐짓 망설이다 겨우 버튼에 손을 갖다댔다.
"네. 김신입니다."
"아..저기..안녕하세요. 그러니까...저는.."
사실 여에게 있어서도 신에게 전화를 걸 때까지 엄청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한 매일이었다. 번호를 저장하자마자 바로 전화를 하자니 별로 친해지지도 못했는데 들이대는 꼴로 보여서 서로 어색할 것 같고, 또 애매한 사이에는 뭐라고 인사를 하며 전화를 걸어야하는 건지도 최대 난관이었다. 아무래도 홀로 지낸 세월이 긴 여에게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해 겨우겨우 핑계를 짜내어 전화를 걸긴 걸었는데 앗차, 한 번도 신에게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여는 입술만 달싹이며 말을 더듬었고 고맙게도 그런 여를 도와준 건 신이었다.
"겁없는 이쁜 형"
"지금 저 놀리시는 거에요?"
농담섞인 신의 말투에 금새 어색했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여의 얼굴에도 신의 얼굴에도 편안한 미소가 걸렸다. 매번 '자신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라는 말을 내뱉는데 그러는 본인은 이름도 모르는 자신을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뒷조사를 통해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꿰고 있는 신에 대해 알리가 없는 여는 문득 그런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가 생각해낸 핑계는 사실 별 거 없었다. 몇 번이고 위기에서 구해주셨으니 감사의 의미로 밥이나 커피를 사겠다는 아주 단순하고 평면적인 것이었고 신은 그것에 가볍게 응했다. 자신이 여의 집 주변으로 오겠다고까지 말하는 신덕분에 밥값보다 기름값이 더 나올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금새 그런 고민은 사라졌다. 지금은 신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으므로.
"나와. 집앞이야."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뛰쳐나갈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놨는데도 불구하고 여는 허둥대며 나가느라 탁자 모서리에 골반을 찧었다. 억소리가 절로나고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지만 이런 상황이 너무나 낯설고 황당하기 그지 없어 웃음이 터져버렸다. 여는 겨우 웃음을 갈무리하고 대문을 나섰다. 익숙한 담배향이 코끝을 스치고 갈무리한 미소가 다시 무장해제된다.
"또 겁도 없이 아무 차에나 덥썩덥썩 타는구나 넌."
"아무나가 아니잖아요."
"내가 어디로 데려갈 줄 알고."
"저 뭐 장기적출같은 거라도 당하나요?"
"뭐?"
"안그러실 거 아니까 됐잖아요."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끄는대로 손을 잡고 차에 올라타는 여를 바라보던 신이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말을 해도 왜 이렇게 경계심이 없는 것인지 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대략적인 직업일 뿐이지 않는가. 심지어 그 직업이 결코 좋은 쪽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웃으면서 먼저 다가오는 여를 어떻게 해야하나 신은 퍽 난감했다. 그래서 반성 좀 하라는 의미로 괜히 훈계하다시피 이야기를 던졌던 것인데 본전도 못찾고 돌아오는 부메랑에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어디서 언변학원이라도 다니는지 한 마디도 지지를 않는 여를 신이 밉지 않게 살짝 째려봤다. 뭘 잘했다고 여의 입이 툭 튀어나와있다.
"뭐 좋아해?"
"그건 제가 물어야죠. 뭐 좋아하세요?"
"소."
여의 입술이 다시 뾰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밥사드린다고 했더니 아주 뽕을 뽑으신다는 둥 대낮에 이루어지는 갈취라는 게 이런 거라는 둥 종알종알거리는 여의 입술을 힐끔힐끔 바라보다 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 나왔다. 이런 재미로 사람을 놀려먹는 건가 싶을 정도로 신은 여를 놀려먹는 것에 심심치 않은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 웃음에 더욱 약오른 누군가의 얼굴이 붉으락해졌지만.
신은 미리 예약해둔 식당으로 지체없이 핸들을 꺾었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 들어오는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와 숯불향, 훈훈한 온기에 여는 잠깐이지만 추억에 젖어 들었다. 생일이라고 고깃집에 데려가주셨던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전의 놀이터에서도 그렇고 신과 함께 있으면 곧잘 이런 감성에 빠져든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 생각 그 이상으로 자신이 신을 의지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물쩡하게 서있는 여의 손을 덥썩 잡은 신이 제일 구석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끌시끌한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스르르 방문이 닫히자 완전히 둘 만의 조용한 공간이 펼쳐졌다.
여는 한참 전부터 꽤나 놀라는 중이었다.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신이 자연스럽게 여의 손을 감싸쥐었고 흠칫 놀랄 새도 없이 그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접시를 짚으며 '이건 나물이야 이건 뜨거운 계란찜이야.' 듣기좋은 목소리가 친절하게 스며들었고 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라올 정도로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간질함은 곧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왜 이렇게 능숙해요? 혹시 주변에 아는 시각장애인이라도 있으세요?"
"있잖아. 너."
당연하다는 듯한 신의 대답에 여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자신과 신은 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직은 어색한 사이인데 그런 사이인 자신을 위해 신이 시각장애인에 대해 따로 공부를 했다는 것이 잘 믿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의 표정을 눈치 챈 신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상대를 위해 이 정도의 노력은 해."
"..."
"니가 용기내서 전화를 걸어주었듯이."
신은 무덤덤하게 여의 앞접시에 잘 익은 고기를 얹었다. 여의 얼굴이 귓볼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마움과 떨림과 부끄러움과 기타 많은 감정들이 북받쳐올라 괜히 깔고 앉은 방석만 꼼지락대며 만져댔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여의 얼굴을 보던 신 역시 머쓱한 마음에 흠흠 헛기침을 해댔다. 이후로 둘은 그저 어색한 기류가 감도는 이 상황을 모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은 열심히 고기를 굽는 데에 집중했고 여는 열심히 고기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낑낑 거리면서 안전벨트를 매던 여는 뒤늦게서야 밥을 사겠다던 자신의 처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거하게 얻어먹기만 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심지어 고기도 신이 다 굽고 자신의 수발까지 다 들어줬다는 생각에 죄책감마저 몰려든다. 하- 깊은 한숨이 땅을 거뜨릴 듯이 강하게 드리운다. 그 소리에 신은 차 시동을 걸고도 바로 출발을 하지 않고 여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디가 불편하거나 잘못 된 것이라도 있나싶은 단지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는데 '제가 사기로 했었는데...' 같은 별 것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여 덕분에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웃음이 나왔다.
"됐어. 벼룩에 간을 내 먹지. 원래 이런 건 형이 사주고 그러는 거야.'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왜? 형님이라고 부르게?"
여의 얼굴에 포근한 웃음이 번졌다. 그래도 역시 얻어먹은 건 얻어먹은 거고 뭐라도 보답해야겠다 싶어 그렇다면 커피라도 사겠다고 했더니 편의점커피면 된다며 가볍게 승낙을 표해온다. 사람눈이 많은 장소보다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해서 덕분에 둘 만의 공간인 차 안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되어 여는 내심 기뻤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신의 시선은 여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 가까이서 여를 관찰하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고 당사자는 절대 모르겠지만 여는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백설같이 하얀 피부와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긴 속눈썹, 여자들처럼 립스틱이라도 칠한 것마냥 붉은 입술. 시커먼 사내녀석들 사이에서 구르고 살아온 신이었던만큼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붉은 입술로 빨대를 물고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왜 하필 지금 이리도 색정적으로 들려오는 건지 괜히 열이 올라 창문이라도 열고싶은데 여가 추워할까 싶어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다행히도 이런 불편한 상황을 깨트린 것은 여가 먼저였다.
"비싼 밥도 얻어먹었고해서, 자진신고할게요. 별로 안궁금하실 수도 있지만."
"뭘?"
"이름 왕여. 나이는 스물여섯. 직업은 점자교열사구요. 보시다시피 눈이 불편하구요."
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굳이 여에 대해 물어보지 않은 것은 미리 뒷조사를 통해 얻을 정보를 다 얻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을 여가 알리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가까워지고 싶은 상대'라고 콕 집어 지칭한 것이 몇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이름조차 묻질 않았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신은 여가 혼자 이것을 가슴에 담아두고 고민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또 괜히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아 제 발이 저리기도 했다.
"다른 거 뭐 궁금한 거 없으세요?"
"너야말로."
신의 갑작스런 질문에 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만나면 하고싶은 말도 물어보고 싶은 말도 많았건만 막상 만나고 나니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져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것을 알고있어 더 궁금한 게 없었던 신이 도망가기 위해 대충 던진 질문과도 같았는데 그것을 어린 아이처럼 고심하고 또 고심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자연스럽게 미소가 걸렸다.
"음..가족...관계..?"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친남매와도 같은 식구들 몇몇이 전부야."
"아...같이 살아요?"
"그래."
여의 얼굴이 다양한 표정을 그려낸다. 처음엔 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마냥 기쁜 마음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다가 곧 가족과 함께 산다는 신의 말에 선망같은 감정이 밀려들어와 얼핏 슬프게도 보이는 표정이었다. 여에게 있어 가족은 있었다가 사라져버린 존재나 마찬가지지만 신에게 있어 가족은 없었다가 생겨난 존재가 아닌가. 여는 그것이 신기하게도, 또 부럽게도 느껴졌다. 신은 그런 여의 표정을 가만히 읽어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전부 다는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여의 생각과 감정에 동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에 처음엔 움찔했던 여도 곧 그 손길에 익숙해졌고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는 곧 새액새액 옅은 숨을 뱉어내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신은 조심스레 손을 거둬들여 안전벨트를 풀어 내고 천천히 카시트를 눕혀 여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혹여나 깰까 느릿하게 코트를 벗어 여의 몸을 감싸려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하필 붉디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손가락으로 선명하게 베어있는 그 입술선을 하나하나 새기듯이 따라 그려본다. 깔끔한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가는 그 유려한 입술이 눈 속 가득 들어왔을 때 이미 신의 입술은 홀린 듯이 그 입술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애써 동정일 것이라 호기심일 것이라 잡아 눌렀던 감정들이 걷잡을 수 없이 넘쳐흘렀다. 두려움, 죄의식, 절망, 어둠. 모든 감정들이 심연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신은 단 하나 남은 빛을 보았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었다.
'Dokebi > 세상 끝까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6 (8) | 2017.02.26 |
---|---|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5 (8) | 2017.02.06 |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3 (10) | 2017.01.22 |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2 (4) | 2017.01.15 |
[김신왕여] 세상 끝까지 01 (4) | 2017.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