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 싫어하는데 왜 삽질이 되는건지....알다가도 모르겠구나...
6편이 네ㅇ버검색노출이 안되어서 올라온 줄 몰랐다는 지인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사실 네ㅇ버 노출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던지라....ㅠㅠ
이로서 난 나만의 공간, 완벽한 음지에서 놀 수 있겠...흐흠흠. 기분 좋으니까 사진 체인지. 상큼해요 청초해.
김신왕여
세상끝까지 07
머리가 웅웅 울려대고 온 몸이 두들겨맞은 것처럼 찌뿌둥했다. 시간을 확인하려 손목을 더듬는데 평소 착용하던 점자시계가 어디다가 벗어둔 건지 만져지지가 않는다. 가만 생각을 해보니 침대 옆 탁자위에 올려두었던 것이 떠오르고 자연스레 그 쪽으로 손을 뻗어보지만 있어야할 탁자가 없다. 그제서야 당황한 여가 이불이며 베개며 이곳 저곳을 더듬어보았고 방에서 나는 익숙치 않은 향이 신의 몸에서 나는 향과 닮아있다고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고스란히 떠오른 지난 밤의 모든 것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화르르 달아오르는 얼굴을 이불에 도로 묻고 여는 창피함에 어쩔 줄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형, 일어났어요?"
"아..응.."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사부작이 다가오는 덕화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여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괜찮냐는 물음과 함께 손에 따뜻한 꿀물을 들려주는 덕화가 고마워 맥없이 웃어보이자 어제 너무 과음을 했다는 둥, 신에게 걸려서 죽을 뻔 했다는 둥 쫑알쫑알 신세한탄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신세한탄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신의 부재가 문득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덕화의 도움을 받아 제 방에 도착한 여는 탁자 위의 시계부터 찾았다. 다행히 딱 점심시간이라 신에게 여유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잔잔한 신호음만이 계속될 뿐, 기다리는 목소리는 끝끝내 나타나질 않는다. 여는 생각했다. 신이 한 번이라도 제 전화를 제때 받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단 한번도 신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여의 지금을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덕화야. 회사가 많이 바빠? "
해장을 해야한다며 콩나물국을 들이미는 덕화탓에 억지로 식탁에 앉게된 여가 한 숟갈을 채 넘기기 전에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정리할 게 많아서 바쁘긴 한데 일 잘하는 우리 김비서님 있어서 괜찮아요. 아까 통화했을 때도 별 일은 없어보이던데?"
"통화를 했어?"
네 좀 전에. 그 간결하고 짧은 대답 하나가 여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덕화의 말대로, 그의 말대로 정말 신이 떠나갈 준비를 하는구나. 정말로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미련도 없이 한국을 떠나겠구나. 또 다시 혼자가 되겠구나. 식지 않아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위로 서글픈 눈물 방울 하나가 굽이지어 떨어졌다. 왜그래 속이안좋아요? 물어오는 덕화에 고춧가루가 너무 들어서 매워서 그래 얼토당토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정말이지 너무 매워서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
'왕여' 두 글자가 띄워진 액정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당장이라도 받고 괜찮아? 오늘 기분이 어때? 안부를 묻고 싶은데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어젯 밤 고스란히 자신의 더러운 욕망과 마주한 탓이다. 스스로의 감정변화가 여와의 사이에 미세하게라도 틈새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돌이킬 수 없이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차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늘 여의 일이 최우선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여의 환한 미소가 늘 그립지만 그렇지 않은 척 멋드러진 위장으로라도 오래오래 그 곁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었다. 그러니 이 위장이 좀 더 자연스러워질 동안만이라도 여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단정지어버리고 만다.
"어때? 먹이는 물었나?"
피곤한 듯 미간을 안마하던 신의 손가락이 멈추었고 곧 지시를 기다리듯 빳빳한 자세로 대기하던 도영에게 입을 연다.
"네. 박사장측에서 매입한 주식이 52%로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 70%를 넘기면 적당한 타이밍에 정보 흘려."
어차피 융통되는 모든 자금은 외국 본사로 돌려두었다. 정리단계에 있는 유신그룹은 이제는 빈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건하고 실하며 경기변동에도 흔들림없이 안정적인 블루칩. 여전히 그들은 유신그룹이 명실상부하다 믿어야했고 믿게해야 했다. 김비서와 신의 명석한 두뇌로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고 박사장은 그 덫에 절반은 넘어온 샘이다. 신은 데스크를 두 어번 더 탁-탁 두드리다 도영에게 꼼꼼하게 봉해진 문건을 건넸다. 꽉 묶여진 실타래를 휘휘 돌려 내용물을 확인하던 도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다시 처음 상태 그대로 문건을 밀봉한다. 그만 나가보라는 말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날렵한 몸동작으로 고개를 숙인다. 탈칵- 사무실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마자 신은 긴 한숨을 뱉어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지만 제 맘대로 안되는 것 단 하나. 왕여, 그리고 마음. 오늘 밤도 길어질 것 같았다.
신의 회피에 가까운 일방적인 위장은 여에게 있어서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가 꽃혔다.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바쁘다는 핑계로 신은 매번 여의 전화를 피했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사무실에서 생활하기 일쑤였다. 어쩌다 연결이 될 법하면 바쁘다는 한 마디 말로 끊겨버리는 전화기를 들고 여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고는 했다. 퍼즐조각 하나를 잃어 완성되지 못하는 그림처럼 여는 늘 어딘가 부족한 일상을 보냈고 그 탓에 교열실수로 팀장님에게 된통 깨지기도 했다.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거나 괜히 귀신처럼 거실을 서성이기도 했다. 하루, 이틀 그런 날이 지속되고 약 이주 째에 접어들었을 때 여는 결국 그 심리적인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쨍그랑-
넓직한 거실 공간이 엄청난 소음으로 가득 매워졌다. 깜짝 놀란 덕화가 2층에서 허겁지겁 뛰어내려왔고 곧이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너무 놀란 나머지 일순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근래 여의 컨디션이 안좋다는 것은 설핏 눈치채고 있었지만 평소 전혀 하지 않을 법한 실수로 만신창이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형! 괜찮아요?!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거실 바닥은 깨진 유리조각 파편들과 쏟아져나온 검붉은 와인들이 한데 뒤엉켜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다. 평소처럼 물을 마시려 냉장고로 다가간다는 것이 일순 방향감각을 상실한 여가 발을 헛디뎌 휘청였고 와인들이 즐비하게 장식된 유리장에 부닥치면서 생긴 끔찍한 결과였다. 유리로 된 장식장이 여에게로 곧장 쏟아져 내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싶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발을 내딛으면서 생긴 생채기로 인해 여의 발이 성한 곳이 없었다. 너무 놀란 탓일까 초점이 희미한 눈으로 제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소리조차 내지 않는 여를 바라보던 덕화가 급하게 그 몸을 안아들었다. 식탁의자에 안정적으로 앉히자 그제서야 미안해, 읊조리며 고개를 푹 숙인다.
"뭐가 미안해. 내가 더 미안해요. 잠깐만 기다려요 형. 발 좀 어떻게 해야겠다."
멀어지는 덕화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깊게 묻었다.
"정말 가지가지한다 나.."
시각장애인으로서 살아온 생은 짧고 살아가야할 앞으로의 생은 길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잘 해왔던 삶이다. 그 삶중에 잠깐 다녀가는 이 친절들에 이렇게 익숙해져서 혼자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어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여는 생각했다. 더 깊이 빠져 허우적대다 이대로 숨이 막혀 죽어버리기 전에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라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가면 이 또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것이라고.
신의 귀에 여의 소식이 들어간 건 여의 처치를 마친 후에 덕화가 건 전화 한통으로부터였다. 신은 덕화의 입에서 여에 관한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뒷말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급하게 소파에 걸쳐진 자켓을 집어들고 무작정 집으로 내달렸다. 신호는 죄다 무시한 채로 딱지가 끊기건 말건 신경쓸 겨를도 없이 그저 엑셀을 밝고 또 밟을 뿐이었다. 현관문을 벌컥 열어재끼자마자 알싸하게 퍼지는 향과 얼룩진 거실바닥이 마치 피흘린 시체라도 치운 것 마냥 을씨년스러워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리고 곧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신은 여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다급하게 열어재꼈다. 늦은 밤이고 이미 여가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따위는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행히 여는 잠든 상태가 아니었고 갑자기 열린 방문에 놀라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저 침대 가장자리에 조용하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앉아있을 뿐이었다. 발에서부터 발목까지 이어지는 칭칭감은 붕대가 눈에 들어왔고 신은 천천히 침대맡으로 다가가 여의 앞에 무릎꿇으며 양 발을 감싸쥐었다.
"괜찮아?"
단단하게 굳힌 마음이 다정한 목소리 하나로 촛불처럼 일렁인다. 후- 불면 사라져버릴 것처럼 불안정하고 미약하게. 너무 오랜만에 듣는 신의 목소리가 반가워서 따뜻하게 발을 감싸는 온기가 너무 그리웠어서 말릴 새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쏟아져나왔다.
"왜그래? 많이 아픈거야?"
"나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갈까요?"
흐르는 여의 눈물을 닦아내던 신의 손이 정지했다. 눈빛도, 심장도, 숨결도 모두 정지한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여가 말을 이어나간다.
"형이 그걸 원하는 거 같아서.."
신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분노로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여가 떠나기를 원했다니 이것은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여의 일이라면 늘 조직일보다 더 우선시해왔다. 여의 발자국 소리도 조곤조곤 내뱉는 숨결 하나까지도 너무 소중해서 행여라도 다칠까 조바심에 걱정만이 앞섰다. 여가 해사하게 웃으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하찮은 제 감정도 죽이고 목숨조차도 걸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말을 쉬게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꽉 쥔 주먹이 분노를 채 담아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렸다.
"무슨 뜻이야."
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입술 끝에도 분노가 가득 들어찼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부서 용암같이 뜨것운 어떤 것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것이 여 때문인지, 자기 자신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해해요. 다들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내가."
텅 빈 두 눈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여의 어깨를 쥐고 흔들어보지만 꾹 닫힌 그 입술은 쉽게 열릴 줄을 모른다. 신의 손에 의도치 않게 힘이 들어가고 미세한 떨림이 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여오는 압박에 여가 아- 짧은 신음 내뱉었을 때야 정신을 차린 신이 급하게 손을 떼고 마른 세수를 하며 탄식한다. 이대로 있다가는 꾹 눌러담은 추악한 내면이 질질 흘러나올 것만 같아서 그 시커먼 마음이 하얗디 하얀 여의 영혼을 물들이기라도 할까봐서 신은 비겁할지라도 먼저 한 발자국 내빼기로 한다. 실수해서, 다쳐서, 에민해져서 그런 거 알아. 그러니 오늘은 일단 좀 쉬어. 그렇게 천천히 뒤돌아 방문으로 향하는데 등 뒤에 날아드는 한 마디에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붙잡히고 만다.
"형도 내가 귀찮아진 거잖아요."
얼마나 오랜 세월 눌러담고 있었던 상처인지 여의 입에서 서글프게 토해내지는 그 진심에 신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진심 속에 여가 살아왔을 지난 날 모두가 담겨 있어서, 곪아터진 상처를 보듬어줄 그 누구 하나 없었을 깡마른 실루엣이 곧 무너질 것처럼 느껴져서. 신이 다시 여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틀렸어."
그 반대야. 여를 마주한 신의 눈빛이 단호하게 빛났다.
"거짓말. 근데 왜 나 피해요?"
"모르는 게 너한테 좋아."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니가 날 도망가게 될테니까. 끝내 말하지 못한 한 마디를 꾸욱 집어 삼킨다. 여는 보지 못할 테지만 그 맑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신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좋고 말고는 내가 판단할 문제에요."
결국 욕망와 인내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던 신의 도화선 심지에 불을 붙인다. 끝끝내 너는 그렇게 만들고야 만다. 신은 상실과 해방을 동시에 느꼈다. 이대로 영영 여를 잃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펄펄 끓는 이 감정을 멈출 수가 없다.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다. 당신이 나를 증오하고 혐오해도, 그 죄악으로 끔찍한 진창에 나뒹굴어도 좋으니 그저 당신이 유일한 내 빛이자 희망이자 모든 것이라는 진심만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신이 무릎 꿇어 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여전히 촉촉히 젖어있는 두 볼을 소중하게 감싸쥐었다.
"그래, 그럼."
여의 입술로 따스함이 내려앉았다. 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그 입맞춤에 숨이 턱 막혀버릴 만큼 벅찬 감정이 간절하고 애틋하게 담겨있어서. 이 모든 게 눈감았다 뜨면 사라질 꿈만 같아서. 여는 어색하게 꿈뻑이던 눈을 천천히 내려감고 어린아이처럼 신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감았다. 펑-펑- 화려한 불꽃이 사방을 장식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이런 게 행복이라는 것이라면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다고, 너무 따스하다고, 그래서 너무나도 이 삶이 찬란하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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