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과 왕여의 첫만남.
구질구질 날씨와 구질구질한 마음.
수혁이가 벤츠남인데...상벤츠..하...
그리고 이 소설은 메모장에 썰로 풀고 혼자 감상하다가,
어거지로 이어붙인 게 많아 어딘가 어색하거나 흐름이 끊길 수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김신왕여
후회 中
기나긴 꿈을 꾸었다. 그것은 딱 열아홉 살의 어느 여름 날이었다.
- 엄마는 너를 믿는다. 넌 우리집 대들보니까.
코를 찌르는 술냄새가 온 방에 진동했다, 여의 볼을 쓰다듬는 깡 마른 손가락에서도 썩은 내가 진동하는 듯 했다. 물질보단 사랑이라고들 떠들어대지만 생각보다 그 물질이라는 것은 어둡고 또 습해서 질척거리며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곤 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도 쪼들리는 살림에 술만 들이키던 어머니도 결국 모두 그 어둠에 잡아먹히고 말았으니까.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뒤덮혔다. 쏴아아- 빈틈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여는 멍하니 바라보다 교문을 나서지 못하고 교단에 쭈그려 앉았다. 거센 비바람에 육중한 나무들이 몸뚱아리를 이리 틀고 저리 틀며 흔들리고 있었다. 여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 마음 속에 깃든 어둠도 저 비바람에 다 씻겨내려가버렸으면 좋겠다고. 메마른 눈덩이에서는 눈물조차 나오질 않았다.
갑자기 내린 비에 마중 나온 부모님 차를 급히 타고 떠나는 아이들, 교복 재킷을 쓰고 그냥 뛰어가는 아이들, 우산을 나눠쓰고 도란도란 걸어가는 아이들 모두를 떠나보내고 여는 터엉 빈 교정과 제법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마주했다. 어디론가 향하는 그들이, 향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자신은 그저 비바람을 핑계로 어디든 머물고 싶을 뿐인데.
- 청승맞게 뭐하냐 너.
까만 그림자가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김신' 조막만한 명찰의 글씨를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잘도 읽어낸 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확인했다. 여는 그 얼굴을 모르지 않았다. 이름만 대도 모르는 이가 없을 찬란하게 빛나는 김신을 여는 늘 사막의 신기루같은 존재라고 여겨왔다. 신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푹 찌는 여름장마 속에 맞닿은 손바닥이 서로의 땀으로 질척였다. 왜 손을 내민건지 물으려는 찰나 고급 외제차 한 대가 둘의 앞에 정차했다. 차에서 내린 중년의 남성은 꾸벅 짧은 고갯짓으로 신에게 목례를 했다. 당연하다는 듯 인사를 받는 신이 성큼성큼 중년의 사내를 향해 나아갔다. 떨어진 손에 남겨진 온기가 뭇내 아쉬워 여는 주먹을 꼬옥 쥐었다. 하지만 곧 다시 찾아든 손이 꽉 쥔 손바닥을 펴내고 까만색 장우산을 들려 준다.
-이거 쓰고 가.
신의 눈이 여의 가슴께에 있는 명찰을 훑는다.
-왕여.
맹한 표정의 여를 보던 신이 실없이 웃으면서 차를 타고 사라졌다. 쿵-쿵- 심장이 뛰고 있었다. 왜 뛰고 있는지 이유도 모른 채, 태풍이 몰아 친 성난 파도가 잔잔했던 마음을 밀고 들어왔다. 우산을 쥔 손에 절박함이 실렸다. 손에 여즉 남은 온기가 너무 그리워서 너무 좋아서 쏟아지는 빗소리에 숨가쁜 울먹임이 한데 뒤엉켰다.
**
쏴- 장대비가 쏟아지는 소리,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신의 뒷모습, 보드랍게 앞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끼며 여는 서글픈 꿈에서 눈을 떴다. 자면서도 울고 있었던 것인지 흥건하게 시야를 가리는 눈물로 인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제 앞머리를 쓸어주는 이가 수혁이라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앞머리를 쓸던 손길이 다정하게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묻는다. 하지만 여는 고개를 내저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칫 입을 떼었다가는 헛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좋은 꿈이라서요-라고. 또 이렇게 병신같이 무너진 너저분한 심장이 애먼 사람에게 상처입힐 생각이나 하고 이래서야 김신과 자신은 무엇 하나 다른 게 없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도 형편없는 자신을 무턱대고 잘해주는 수혁이 표현할 수 없을만큼 고마웠지만 한 편으로는 너무 미웠다. 자꾸 여지를 주게 되고 자꾸 기대게 되고 그러면서도 흔쾌히 마음을 주지 못하는 자신에게의 자괴감이 내내 찾아와 절 괴롭히기에.
"사장님 출근안하세요?.. 그러다 가게 망해요."
근 한 달간을 매일같이 드나드는 수혁에 부담반 미안함반으로 푸념을 뱉어놓는다. 그 때마다 능청맞게도 가게에 이쁜이가 없어서 어차피 손님이 없다는 둥, 돈 많아서 놀고 먹어도 평생 걱정없으니 같이 살자는 둥 농담을 늘어놓는 통에 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곤 했다. 거의 반강제적으로 휴직상태가 된 여는 그저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눈치도 없이 수혁은 항상 저 모냥이다. 밤새 흘린 식은땀탓에 심한 갈증이 몰려온 여가 터벅터벅 걸어가 냉장고문을 연다. 수혁이 채워넣기라도 한 건지 텅 비어있어야 정상일 냉장고가 빈 틈없이 한 가득이다. 이러지 마시라니까 또 이래놨다며 투덜거리자 수혁이 피식 또 웃어넘긴다. 생수병을 따 대충 목을 축이고 식탁에 앉은 여가 겨우 숨을 돌리는데 무던한 수혁의 목소리가 툭 굴러떨어진다.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나는 안되겠어요? 도저히?"
언젠가 무심코 돌린 TV 드라마 채널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던졌을 법한 대사였다.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타인과의 사랑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기억을 지워준다? 지나간 사랑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해 준다? 그런 병신같은 사랑이 어딨어. 그런 병신같은 새끼가 또 어딨고. 이것이 수혁이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여를 볼 때면 늘 생각한다. 그 사람의 대신이 되어주고 싶고, 그 모든 상처를 지워주고 싶다고. 그토록이나 병신같은 사랑이라 욕했던 남자주인공이 어느샌가 자기 자신이 되어있는 것에 수혁은 새삼 스스로도 웃음이 났다.
"사장님이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그게 너라잖아 내가."
"하지만 저는.."
"그렇게 스스로를 부정하면, 그런 당신을 좋아하는 내가 뭐가 되겠어요?"
죄책감, 슬픔, 미안함, 거절 다 좋아요 좋은데, 스스로를 너무 학대하고 몰아붙이지는 마요. 그럼 당신이 가진 그 죄책감과 미안함들이 순전히 내 몫이 되니까. 나한테 정말로 미안하면 우리가 어떤 관계여도 좋으니까 웃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수혁의 절절한 진심이,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여의 심장에 젖어들고 물병을 꽉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죄송해요- 읊조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눈물만 쏟아내는 여의 곁으로 다가간 수혁이 차분하게 보드라운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괜찮아요-.
한창을 울고 진을 빼고 나니 이럴땐 배를 채워야 한다며 수혁이 등을 떠미는 통에 여는 얼떨결에 씻고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었다. 밤에 출근하는 일의 특성상 늘 낮엔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던 지라 햇볓이 따갑게 쪼아대는 하늘이 왜인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따가운 햇살 아래로 더더욱 날카롭게 눈을 파고들어 현기증마저 일 듯한 실루엣이, 눈빛이 저를 마주한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멀리서 그저 이 태양 아래에서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여씨 뭐해요 안가고. 어깨를 안아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여의 눈길이 반사적으로 아래로 떨어졌다. 죄진 것도 없는데 죄진 사람마냥, 화낼 사이도 아닌데 화난 사람마냥 끈덕지게 시선을 떼지 않는 신의 눈길을 느끼며 여는 다급하게 수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가요 배고파요-.
**
신은 거의 매일을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붙박은 듯 서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반 쯤 음영진 그 얼굴이 지금의 우리의 관계와 같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이제는 너무도 희미해져 흐릿해져버린 그 경계처럼. 늘 나른한 눈을 하고 가로등 벽에 기대서 발밑에 담배꽁초가 소복하게 쌓일 때 즈음 쓸쓸하게 보여지는 등을 여 역시 거의 매일을 지켜본다. 어둠속으로 자박자박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나면 여의 마음 속에도 깊은 어둠이 깔리곤 했다. 마치 영영 낮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눈물은 나오질 않았다. 그저 덕지덕지 땜빵한 심장을 그러안고 침대에 누워 새까만 밤을 뒤집어썼다. 반쯤 감긴 눈이 여전히 창밖을 쫓고 있음에도.
계절이 바뀌고 입던 옷이 얇아지고 수혁과의 관계가 편해지고 모든 것이 변해가는데 오로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신과 여, 두 사람의 관계였다. 여전히 얇은 창문 하나를 두고 고작 몇 미터의 사이를 두고 마치 그 거리가 몇 억 광년 떨어진 별이라도 되는 것 마냥 먼 발치에서 서로를 주시한다. 말 한 마디 나누질 않아도 그 속내가 너무나도 잘 보여서 그만큼이나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이 여를 더 괴롭게 하는 지도 몰랐다.
휘여청 떠있는 달이 파르르 떨리고 땅은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하고 진탕 취한 술이 온 세상 만물을 흔들어대는데 왜 그 사람의 그림자 하나를 흔들지를 못하는지. 휘청거리는 이 발걸음에 놀란 눈을 하고 가로등에 기대선 몸을 일으키는 그 모습이 왜이리 선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 여는 누구에게 해야할 지 모르는 원망을 쏟아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스러져가는 몸을 부축하는 단단한 온기가 느껴진다.
"괜찮아? 얼마나 마신거야?"
여는 부옇게 흐려진 눈을 벅벅 문지르며 온 힘을 다해 그 손을 뿌리쳤다.
"놔."
반동으로 다시 심하게 휘청거리는 여를 신은 더 세게 붙들어 잡았다. 놔! 놓으라고 개새끼야! 악을 쓰며 발버둥치는 여를, 아무렇게나 휘둘러대는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묵묵히 버티고 섰다. 그렇게 때리고 때리다 지쳐버린 여가 신의 멱살을 쥔 채 푹 숙인 고개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 몸의 수분이, 원망이, 슬픔이 마구잡이로 쏟아져나와 구석구석이 쑥대밭이었다. 들썩이는 어깨와 가쁘게 토해 놓는 그 입김이 가늠할 수 없을만큼 넓고 깊은 아픔이라, 쓰레기같은 제 삶에 대한 지지부진한 쓴 맛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듯 했다.
"잘못했어.."
"하지마."
"햇빛이 필요한데 왜 계속 밤뿐인지를 몰랐어.."
"듣기 싫어..흐읍.."
"니가, 니가 내 전부라는 걸 몰랐어 내가."
모든 것이 행복했다. 간간히 서늘한 바람이 살랑이던 둘 만의 등하교길도 행복했고, 언덕 위에서 입맞추던 얼굴 뒤로 보이던 색채 가득한 노을도 행복했고, 혹여라도 놓칠 새라 꼭 붙들어 잡은 손 마디마디가 행복했고, 흥분에 가득차 열기품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정신없는 눈동자조차도 모두, 행복했다. 그렇게도 행복히 지천에 널려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불행이라는 절대자는 애초에 행복이란 건 없었다는 듯이 모든걸 전복시켰다. 불행이라는 그 어둠의 감탕에 아무렇지도 않게 아름다운 추억을 빠뜨려 죽여버린 신을, 그래서 여는 더욱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난..김신 니가.."
바늘로 콕콕 찌르듯 밀려오는 숨을 억지로 이어나간다.
"니가 영원히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숨을 겨우 몰아쉬며 여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로등 불빛이 신의 얼굴을 완연한 어둠으로 감쌌다. 아슬하게 유지하던 그 경계가 다 타버리고 새까만 재만 남았다. 문득 단 한 웅큼만이라도 좋으니 빛이 필요하다 갈망했으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깜깜한 밤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있었다.
'Dokeb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신왕여] 센티넬버스 05 (8) | 2017.03.08 |
---|---|
[김신왕여] 센티넬버스 04 (10) | 2017.03.05 |
[김신왕여] 엘리트 김신 X 진성게이 왕여 (2) | 2017.02.26 |
[깨비사자/깨비이혁] 다시 시작 04 (6) | 2017.02.23 |
[김신왕여] 의사?레지던트?약사?한의사?썰들.. (8) | 2017.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