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재벌 IT기업 대표이사 김신 X 진성게이 모델왕여
오래 전에 썰을 메모장에 풀다가 만건데 대충 정리해서 이은 것.
어둡고 마이너스러운 자급자족용. 완결미정.
김신왕여
강렬하게 내리쬐던 태양 아래 우뚝 선 너는 붉은색이었다.
뜨거운 빛을 모조리 삼켜낸 너는 쨍한 붉은색이었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 달콤한 과실이 날 완전히 썩게하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나를 완전히 삼켜버리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사랑인 줄을 모르고.
Trial
비행내내 잠이라도 잤던 건지 덥수룩한 머리가 삐쭉빼쭉 튀어나와있다. 길쭉하게 뻗어지는 다리에 나른함이 한가득이지만 그 귀찮아보이는 행동에도 타인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고만다. 여는 공항을 빠져나오지마자 담배를 베어물고 선글라스를 대충 접어 셔츠에 걸었다. 얼마만에 올려다 보는 한국의 하늘이며 태양인지 눈부심에 찡긋거리면서도 한참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보고 또 본 것인지 잔뜩 구겨져 너덜거리는 잡지가 여의 한 쪽 손에 들려있다. 한국의 떠오르는 IT업계의 샛별 김신 이라고 새겨진 다소 거창한 문구 뒷켠으로 흘러간 세월만큼 깊어진 눈동자를 한 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렇게나 봐놓고서도 마치 처음 접하는 것마냥 여는 그 모습을 주시하다 조근히 웃어 보였다.
모든 것이 모험이었다. 한국에 온 것도 신이 묵고 있다는 호텔로 찾아온 것도 카운터를 통해 왕여라는 이름을 전달해 올린 것도. 13년 잠적한 인간을 그것도 최악의 마지막 인상을 남겼던 인간을 불알친구라고 해서 흔쾌히 받아줄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라면, 김신이라면 봐주지 않을까하는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기대. 하지만 그 기대가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곧 카운터의 호텔리어가 올라가보라는 말을 전달해온다.
"오랜만이야 김신."
"13년만에 나타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신은 룸으로 걸려온 전화로 왕여, 그 두 글자의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 순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13년이다. 여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그 날 밤 이후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마주하면 어떤 표정으로 대할까 무슨 말을 꺼낼까 밤새 고민으로 뒤척였던 밤을 하찮게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깨끗하게 사라졌다. 한참 뒤에 외국으로 유학갔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신은 허탈감에 욕지거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용건은."
버릇처럼 묻어나는 사무적인 말투에 여는 문득 쓸쓸해졌다. 자신이 모르는 세월이 묻은 신이 낯설어서. 또 그리워서.
"재워줘."
"뭐?"
"오늘 한국 들어왔어 나.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
모험에 오기를 더했다. 어린아이처럼 땡깡이라도 부리면 한 번 더 쳐다봐줄 것 같아서 괜히 그래보고 싶어졌다. 여는 잘 곳을 찾는답시고 아는 사람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늘 그러하였듯이 대충 클럽에 가서 적당한 상대를 찾아 술잔을 부딪치고 호텔이든 모텔이든 상대의 집으로든 발을 들여 즐거운 밤놀이로 하루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굳이 막무가내로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신을 찾아온 것은, 사실 그 이유는 여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끈덕지게 이어진 인연을 완전히 끊어내버리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 것인지.
"들어와."
신이 냉담하게 자신을 쳐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신은 늘 그랬으니까. 세상에 관심이 없는듯 무심한 눈을 하고 있지만 의외로 불쌍한 것에 마음이 약했다. 무뚝뚝하고 귀찮은 것을 질색하지만 늘 여의 물음엔 꼬박꼬박 답해주곤 했다. 그런 신이니까 그런 그였으니까 자꾸만 질척한 이 마음이 끊기지를 않는 것이다.
"적당한 거처가 정해지면 바로 나갈게."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끌고 스위트룸에 발을 들였다. 대충 외투를 소파에 던지며 금방 나갈 거라는 핑계를 댄다.
"완전히 들어온 거야?"
여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직업관계상 한국에 완전히 눌러 살기에는 아까운 면이 없지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는 잘 팔리는 모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경력있는 모델인지라 종종 무대에도 서는 편이었다. 사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는 한국의 한 패션디자이너의 적극적인 어프로치 때문이었다. 여가 자신에게 있어 꿈에 그리던 뮤즈라고 꼭 한 번 작업을 해보고 싶다며 1년넘게 꾸준히 매달리기에 덜컥 수락을 해버린 것인데 여에게 있어 한국은 곧 김신이라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싱숭생숭했었다.
"글쎄."
그래도 손님이라고 차를 내어주며 맞은 편에 털썩 앉는 신을 빤히 바라봤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마치 꿈속에서 바라보는 제3자의 시야 같아서 지독하게도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곧 잔혹하리만큼 빠르게도 산산조각났다. 찻잔을 든 신의 왼쪽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하고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관통한다. 지그시 그 반지에 시선을 멈춘 여가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했다.
"예뻐?"
"뭐가?"
여는 대답대신 고개를 까딱이며 반지를 가르켰다. 그 턱끝이 가리키는 곳에 시선이 닿은 신이 그제서야 여가 제 반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에 눈치챘다. 신이 그 반지를 괜히 빙글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자 여도 곧 관심없다는 듯 제 할말을 뱉어냈다. 대표이사 사모님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난감한 상황임이 불보듯 뻔했기에.
"괜히 찾아왔네 내가 눈치도 없이- 알았다면 안왔을텐데 미안. 가볼게. 얼굴도 봤고. 잘 지내니 다행이고. "
무엇에 그렇게 겁을 먹은 것일까. 여는 이상하게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을만큼 두려워졌다. 13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고 또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여는 그 날 밤 그 어린 시절의 겁많은 꼬맹이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스스로를 더욱 한계점까지 옥죄어왔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데 김신조차도 변했는데 왜 자신은 늘 제자리걸음인 건지. 퇴색하고 변질된 지난 일들 정도는 이젠 그냥 떨칠 때도 되었건만.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이 떨려왔지만 여는 빠르게 그것을 잡아끌며 무마시킨다. 문까지 성큼성큼 발을 내딛을때까지 가만히 있던 신이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나서야 낮게 읊조린다. 거기 서-. 그 위압감에 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나도 안변했네. 이기적인 것도 비겁한 것도."
내뱉어 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 정답이라 여는 단 한 마디도 되돌려주지 못하고 못박은 듯 자리에 섰다. 눈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여전히 몸은 현관쪽을 향한 채다. 신의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제 바로 뒤에서 숨결이 느껴졌지만 뒤돌 수가 없었다. 신은 캐리어 손잡이를 피가 안통할 정도로 세게 쥔 여의 손위로 제 손을 겹쳐 쥐었다. 생각지 못한 터치에 깜짝 놀란 여가 그제서야 토끼눈을 하고 신을 돌아본다.
"이번엔 안돼. 또 도망치는 거 보자고 너 이 방에 들인 거 아냐."
"무슨 소리야,"
"그건 니가 더 잘 알겠지."
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꼭 이런 식이다. 언제까지고 여는 제멋대로고 목표에 도달하기 직전에 발을 빼고 도망간다. 그 때도 지금도. 신은 그런 여를 이번만큼은 결코 봐주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눈감아주고 모른 척 묻어주는 예의나 의리는 13년 지켰으면 충분하다. 이제는 저 거짓만을 고하는 못된 입술이 진심을 뱉어낼 때까지, 꽁꽁 감춘 그 마음을 토해낼때까지 절대로 놔줄 생각이 없었다. 비즈니스적인 약혼관계야-. 신은 보기좋게 여가 도망갈 핑계를 없앴다.
*
어둑해진 밤하늘이 맑았던 낮의 태양을 망각한듯 쏴아- 장대비를 쏟아낸다. 여는 신의 의지대로 기어이 눌러앉은 스위트룸 엑스트라 베드에 앉아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며 신경안정제를 털어넣었다. 비가 오는 날은 약이나 술이 없이는 잠들기 힘들다. 환영인사치곤 과하네- 중얼거리던 여가 새우처럼 몸을 말고 털썩 몸을 뉘인다. 약기운에 몽롱해진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창문에 부딫치는 일정한 빗소리를 감상하다 끝끝내 멀어지는 의식 속에 여는 어느샌가 교복입은 열아홉살 왕여로 돌아가 있다.
어스레하게 빛이 들어오는 창가, 쏟아지는 빗방울, 김신의 향기로 가득찬 그의 방안에서 잔뜩 구겨진 시트를 움켜쥐고 웅크려 누워있는 자신. 하아-읏- 불규칙적인 신음소리가 빗소리에 함께 섞여들고 자신의 물건을 쥐고 바쁘게 움직이는 손에 온 몸이 저릿한 감각으로 후끈 달아오른다. 신아, 김신...흐읏.. 내뱉어지는 바튼 숨을 마지막으로 잔뜩 욕정을 토해내고 신의 향기가 벤 시트에 코를 묻는다. 그리고 끼이익-소리에 놀라 돌아본 그 곳엔 열린 방문 틈으로 우뚝 선 신의 경멸스러운 눈이 있다. 놀람도 뭣도 아닌 그저 경멸어린 시선이.
"하아, 씨발."
가쁜 호흡과 함께 번쩍 뜨인 눈이 따끔거린다. 여는 지저분하게 말라붙은 눈물자욱 위로 손등을 얹었다. 항상 꿈은 이런 식이었다. 이 꿈은 오랜 세월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오랜 친구에게 발정해버린, 결코 넘어서서는 안 될 선에 발을 딛어버린 끔찍한 자신을 수 백번 마주하지만 덤덤해지기는 커녕 되려 선연하게 파고듬에 여는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있었다. 역시 이 곳 한국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김신은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감이 뒤늦게 몰아쳤지만 이미 일은 저지른 것이고 남은 건 수습뿐이었다. 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도 새벽이다. 반대편은 점심때 쯤이니 딱 좋겠다 싶어 급하게 전화를 건다.
"나야, 제이슨. 작업시일을 당기고 싶어. 오늘 저녁에 미팅 잡아줘."
제이슨은 여를 모델계에 발을 들일 수 있도록 적극적인 도움을 준 친구다. 클럽에서 처음 만나 섹스까지 했고 종종 만나 같이 밤을 보내는 파트너였지만 애인은 아니었다. 신이 없는 지난 세월은 제이슨과 함께한 날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정도로 그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오마이갓, 지져쓰를 연발하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여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제멋대로인 제 성격에도 곧잘 맞춰주는 제이슨에게 여는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후 7시? 알겠어. 고마워."
"애인인가봐."
전화를 끊자마자 날아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가 뒤를 돌아봤다. 새벽이라 깨어있으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한 손에 맥주를 든 신이 비스듬히 문가에 기대어 서있다. 그 모습이 마치 그 날 밤처럼 오버랩되어 죄진 것도 없는데 죄진 것처럼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비즈니스 파트너야- 답하자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머금는다. 천천히 혀를 굴리며 음미하듯 삼켜낸 신이 피식웃으며 돌아선다. 섹스 파트너겠지- 바닥까지 꼬인 음성이 던져지고 여의 미간이 있는대로 잔뜩 구겨진다.
정말이지 무엇을 기대하고 저 얼굴을 다시 보겠다 마음 먹은 것일까. 아름답고 찬란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부옇게 가려졌다. 여는 눈을 질끈 감고 다짐하고 또 희망했다. 더 늦기 전에 김신에게 영원한 작별인사를 건넬 수 있기를. 더 미쳐버리기 전에, 모든 것이 완벽한 그에게 새까만 오점을 남겨버리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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